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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어디서 만날까?"
"중간인 S백화점 어때? 거기서 볼까?"
"그래, 좋아 언니, 그럼 그날 만나"
대학교 때 연합 서클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 한 살 차이가 나서 언니라고 부르는, 나의 25년 지기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을 캘린더에 표시하며 나는 문득 아리송해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싱가포르에서 귀국한 친구네 집들이니 1년은 족히 넘은 셈이다. 20대 때 가장 친했던 친구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꼽는 친구건만, 막상 우리가 만난 횟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그만큼 서로가 바빴던 걸까? 돌이켜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의문을 품은 채 나는 설거지를 했고 싱크대 주변을 닦았다. 고무장갑을 탈탈 털어 집게에 꽂아 걸어둔다. 다음 날 바짝 말라 있을 장갑을 기대하며.
"우리 맛있는 거 먹었으니 이제 린이 거 사러 가자."
"에엥? 괜찮은데?"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이모로서 사주고픈 마음이 있는 거야. 우선 오빠 거 만두부터 한 팩 사자. 여기 육즙 그릴 만두 유명해."
"언니 진짜 괜찮은데......"
만두를 사고 저쪽 편 디저트가 모여있는 곳으로 친구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린이 어떤 빵 좋아해? 이런 마들렌 좋아해? 아님 생크림 케이크 같은 거? 아니면....."
"언니, 진짜 린이는 디저트를 안 먹어. 오로지 밥, 밥이랑 면을 좋아해!"
"그래? 그럼 가만히 있어봐. 저쪽으로 가보자."
다시 성큼성큼 우리가 먹을 걸 샀던 섹션으로 건너가는 친구. 오니기리와 가라아게 같은 것들을 파는 곳으로 가더니, 여기서 인기 많은 게 뭐냐고 직원에 묻는다. 직원의 말에 몇 가지를 담더니, 휙 돌아서 족발을 파는 곳으로 향한다.
"린이 족발 좋아해?"
"언니, 진짜야. 족발도 잘 안 먹어"
"가시내야 그건 네 생각이고. 여기 족발도 맛있는데...... 아!"
뭔가 떠오른게 있는지 그 옆 분식 파는 곳으로 고개를 휙 돌린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주문 중이었다.
"떡볶이 포장해 주세요. 납작 만두도 추가해 주시고요."
이쯤 되니 말리는 게 무색하게 느껴진다. 보통은 ‘아이가 빵을 안 좋아해.’에서 끝나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달랐다. 거기서 꺾일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게 있었고 반드시 해야 했다. 이유는 심플하다. 진심으로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반발짝 뒤에서 지켜보곤 했다.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 곧 되갚아(!) 주어야지 다짐하면서.
그렇게 언니의 S백화점 푸드코트 평정은 신속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볍게 왔던 내 두 손에는 묵직한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평소 무겁게 들고 다니는 걸 꺼리는 데다 돌아갈 길이 꽤 멀었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언니가 고마웠다. 그리고 새삼 딸과 남편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음을.
나는 유년 시절 지방에서 보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유년 시절 친구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더라면 오랜 친구로 곁에 남아 있을 텐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낯선 도시에 적응하는 동안, 상대 평가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또래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것이다.
대학교 친구들은 어떤가 우리에겐 공백기가 존재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빨랐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 친구들이 정기적인 모임으로 만나 근황을 나눌 때 나는 아이와 함께였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아이와 손잡고 놀이공원이나 캠팽을 가거나 식당에서 따로 챙겨간 주먹밥을 먹이는 시간으로 나의 30대 초반을 보냈다. 내가 어린 아이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육아 시기를 지나니 친구들에게 육아의 시기가 찾아 왔다.
그런 시간을 지나오며 나를 지배해 온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는 속을 나눌 친구가 별로 없구나'
하지만 없는 게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주름이 늘고 무채색 옷이 많아지고, 뾰족한 힐보다는 편한 단화를 신고 있을 뿐 그들은 거기에 늘 있었다.
양손 무겁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걸 느꼈다. 친구가 그날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 먹고 돌아가는 길 아이 줄 음식을 챙겨주려고 일부러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이었다.
서툰 20대 때나 그때보다는 조금 더 여문 40대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았다. 아이를 챙기고 남편을 챙기느라 나이 드신 양가 부모님을 돌보느라, 밥벌이를 하느라 친구를 떠올릴 여유가 없었을 뿐.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발송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찬찬히 끌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치열한 일상에 치여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내 삶의 현관문 앞에는 언제나 다정한 마음들이 배송되어 있었다.
마음의 여유는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이제 조금 알겠다. 나에게 배송된 '친구'라는 상자를 때때로 열고 닦아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이 먼지에 가려지지 않도록.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을 때 짠 하고 나타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준 이들이기에. 이제 내가 그들을 살뜰히 챙기고 싶다. 서로의 나이 드는 걸 보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신비한 존재, 서로 다르게 생겼지만 묘하게 닮아있는 우리들이니까.
이번 배송도 잘 받았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