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그라닛 호즈
“저기 유칼립투스야.” 짧은 숲길에서 파스칼이 나무를 가리켰다.
보기에도 매끄러운 청회색을 띤 흰색 줄기의 유칼립투스 나무가 거목으로 우뚝 서 있다.
“아! 크네요”
두꺼운 몸통이 수령처럼 늠름하다. 키도 족히 15m는 넘어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는 유칼립투스가 긴 여행 끝에 이곳에 뿌리내렸다니. 의아하지만 이 낯선 땅에 머물러 살기까지 노력해 온 시간이 보이는 듯해 짠하고 또 멋졌다.
비탈진 오르막 길가에는 은엽 식물들이 줄지어 자라 있다. 햇빛에 반사된 은색 광채가 보기에 좋아 무심코 손으로 잎을 한번 쓱 쓸어본다. 향기를 맡으려 손을 코에 가져가니 강한 카레 향과 어딘지 익숙한 한약재 냄새가 섞여 나왔다. 은녹색의 식물 이름을 검색해 보니 ‘커리 플랜트(helichrysum angustifolium)’라는 허브다. 이름을 보자 맡았던 향이 커리였음이 분명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안에 남은 한약재 냄새가 자꾸 마음을 끈다.
유년기 내내 한약을 달고 살던 나는 쓴맛과 냄새가 싫어 억지로 입을 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향을 조심스레 되새기고 있다. 끔찍하게 싫던 냄새가 이렇게 아껴가며 맡는 향이 될 줄이야… 쥔 손 사이로 향을 들이마시며, 거세진 바람에 날아갈까 봐 쥔 손을 더 꼭 쥐었다. 시간의 마법은 참 신기하다. 엄마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쌍심지를 켜고 먹이던 한약이 이제는 엄마의 향처럼 느껴지다니. 한약에 담긴 기억이 늘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맹목적으로 향을 쫓고 있다.
내가 커리 플랜트 향을 맡으며 휴대폰을 검색하느라 멈춰 서도, 파스칼은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에서 ‘얼른 검색해 보라’는 눈빛으로 다정한 추임새만 보내온다. 결이 맞는 사람과의 여행이란 이런 것일까? 새삼 즐겁다. 나만큼이나 식물을 좋아해 주는 동행자에게 미안할 필요 없이, 조급함 없이, 함께 멈추어 서서, 정체를 알아내려는 모습이 마치 든든한 동료 탐정 같다.
분홍색 화강암 지대를 가까이에서 천천히 걷다 보니, 멀리 최북단 절벽 끝에 선 플루마나크 등대(Phare de Ploumanac’h Men Ruz)가 보인다. 등대에 가까워질수록 하트모양, 거북이 모양 등 자연이 빚은 조각품 같은 바위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해변 야외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처럼 걷는 내내 바위와 조우하며 감탄하고 또 걷고, 다시 발견하기를 반복한다. 수많은 바위 중에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 ‘카사 밀라’ 저택의 옥상 굴뚝이 떠오르게 하는 형상들도 있다. 외계생명체의 얼굴과 같은 바위들도 보인다. 흡사 같은 제작자라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속 놀란 얼굴이 떠오르는 바위도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슬픔을 조각해 낸 예술품들처럼,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도 묘하게 슬펐다. 모든 예술은 자연에서 비롯된 영감에서 탄생한다더니, 그 말에 믿음이 한층 더 굳건해졌다.
파스칼과 나는 웅장미 넘치는 거대 바위 앞에서 바람이 몰고 온 바다의 요오드 냄새를 맡으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래 기억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찰칵’
해풍이 실어 온 청량한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운다.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맑아지는 순간이다.
듬성듬성 놓인 바위 작품들을 지나며, 등대에 가까워졌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편평한 초록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에는 해안가에 서식하는 키 작은 식물들과 분홍빛 에리카(Erica cinerea)가 진초록색에 묻혀 자라있다. 하늘거리는 흰색의 레이스 플라워, 아미초(Ammi maju)도 바람에 선들거린다. 분홍빛이 바래가는 아르메리아 (Armeria maritima)는 낮은 덩이처럼 퍼져 자라 있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이마와 목덜미를 쓸면서,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을 상쾌하게 훑고 지나갔다. 정상에 오른 보람으로 미소가 절로 번졌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등대 주변으로 우리도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의 햇살은 유독 더 따가워서 이마에 두른 손차양도 금세 뜨거워졌다. 강한 뙤약볕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파스칼과 서로 잘했다며 작은 칭찬을 주고받는다. 이게 뭐라고 괜스레 웃음이 났다.
거대한 화강암을 주춧돌 삼아 세워진 등대 앞에서, 관광객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남긴다. 그 순간만큼은 견고한 사다리꼴 모양의 등대도, 자신을 빙 둘러싼 사람들에게 포즈를 취해주는 모델처럼 다정해 보였다.
오른편 등성이 위에서는 사초과의 부드러운 그라스 무리가 양치식물과 군락을 이루며, 바람 부는 방향으로 춤추듯 누웠다.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 위로 바위에 에둘러진 과학박물관 Maison du Littoral 이 보인다. 박물관은 연안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소개하는 전시 • 체험의 공간으로 푸른부전나비(Azuré des nerpruns), 에리카(Bruyère cendrée), 가시금작화(Ulex europaeus), 붉은가슴방울새(Linotte mélodieuse) 등의 생생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암벽과 덤불 곳곳에 새들의 서식지가 보물처럼 숨겨져 있음을 조용히 알렸다.
파란색 카펫과 흰 천장이 바다를 표현하고 있는 박물관은 큰 아치형 창문을 달고 아이들에게 너른 볕을 쐬어주었다. 탁 트인 브르타뉴 바다가 보이는 박물관에서 아이들은 바다와 자연을 배우며, 얼굴에 일상의 평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창 앞에 서서, 마치 평화로운 곳을 찾아 떠나온 바다표범처럼 바다를 바라보았다. 순간, 내 시간도 멈춘 듯 마음이 고요했다.
박물관을 나서자, 온몸에 가시를 두른 채 쭉쭉 자라난 노란 가시 금작화들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우리는 오래된 성을 둘러보고 해안 길을 걷다가 하산 루트를 정하기로 했다. 파스칼은 여러 갈래로 나뉜 페로 기렉 마을 방향 지도를 펼쳐 보여주며, 선택권을 내게 주었다.
A, B, C로 나뉜 길 중, 나는 긴 코스 중간쯤과 단거리 코스를 잠시 고민하다 결국 짧은 구간을 선택했다. 저녁에 한국 요리를 대접하려면 체력을 조금 아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티끌 같은 이 계획에라도 차질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 우리와는 다른, 긴 여정의 여유로운 하산길을 택한 모양인지 우리가 터덜터덜 걷는 이 길에는 사람 하나 없다. 조용히 둘만 걷는다. 파스칼은 트레킹 모임에 나갈 때마다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쉬지 않고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헉헉대는 나와 달리 훨씬 잘 걸었다. 나도 더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내일은 잊고,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어디든 가보고 싶었다.
경사가 완만해지며 페로 기렉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과 야자나무가 어우러진 정성스러운 집들, 그리고 잔잔한 바다 위에 정박한 요트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 오르기 전 노천까페에 들러 목을 축이며 더위 한 땀을 식히기로 했다. 나는 시원한 맥주한잔을, 파스칼은 청량음료를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켜 목 넘김을 하자 세상이 온통 시원하게 느껴졌다. 한소끔 땀을 식히고 취미로 어떤 운동을 하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별스럽지 않은 얘기들을 나누며 여유를 부렸다. 짱짱한 햇살 아래,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으로 마음을 적셨다. 기념품 샵 앞을 오가는 관광객들의 웃음 섞인 수다 소리마저, 마음을 스르르 풀어놓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간 생브리외의 까르푸 아시아 식품관에서, 파스칼은 한국 식자재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얘기가 잠깐의 귀향처럼 느껴졌다. 메뉴는 식자재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허브향이 우리를 먼저 맞는다. 매장 입구에 로즈마리, 딜, 민트 등 다발로 묶인 허브 더미들이 쌓여 있다. 오븐 요리에서 향과 풍미를 담당했던 로즈마리, 샐러드와 수프에서 맛을 내던 딜, 청량음료와 칵테일의 데코를 담당했던 민트였다.
민트는 파리의 베트남 쌀국숫집에서 유독 깊은 첫인상을 가졌다. 쌀국수와 분짜에 유독 민트가 많이 얹어져 나오는 이 집은 유명한 맛집이었다. 고수 대신 민트를 가득 올린 요리도 인상적이지만 민트가 더 기억에 남았던 곳은 쿠스쿠스 레스토랑에서다.
차를 따라주러 온 사장님이 바로 눈앞에서 두툼한 손바닥으로 민트를 유리잔 안에 비벼 넣었다. 그러고는 주둥이가 가늘고 긴 주전자를 하늘 높이 들어올려, 물줄기를 길게 떨어뜨리는 묘기를 선보였다. 거칠게 으깨진 민트와 낙차가 일으킨 물거품이, 감각까지 화하게 했다. 덕분에 차 맛은 양치한 듯 개운했다. 그 후로 민트가 들어간 칵테일이나 청량음료를 식음할 때면, 흰 셔츠 소매를 전완근까지 걷어붙이고 차를 만들어주던 사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조로운 식당에 갈 때면 퍼포먼스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파스칼에게 들은 대로 아시아 식품관에는 한국관도 있었지만, 국적을 알 수 없는 라면과 소스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국산 제품 하나 없는 한국관에서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맴돌 때 운 좋게 한 개의 한국산 불고기 소스를 발견했다. Made in Korea. 메이드 인 코리아가 이토록 반가운 문구였다니. 실망만 가득하던 내 표정이 환해지자, 그간 지켜보던 파스칼의 표정도 함께 개었다. 참기름은 어쩔 수 없이 외국산이었지만, 잘 익은 호리병 모양의 배와 쇠고기 안심 그리고 먹을 과일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쌀은, 내가 찾던 이탈리아 쌀은 없었다. 그래도 가늘고 찰기 없는 인디카 품종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유럽 내 쌀 생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는 키우는 품종도 여럿이어서, 우리처럼 짧고 둥근 모양에 찰기 있는 쌀도 재배했다. 그래서 쌀은 늘 이탈리아의 신세를 지고 살았다. 이탈리아 땅에 어쩐지 정이 가더라니…쌀을 많이 먹는 반도 국가여서 그랬나 보다.
집에 도착한 파스칼이 들뜬 목소리로 “우리 한국요리 할 거야”하고 이반에게 알렸다. 모니터를 골똘히 바라보던 이반은 고개를 돌려 웃어 보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재택근무 중인 이반을 남겨두고, 우리는 주방으로 모였다.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시 그러모아, 본격적인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내 옆으로 파스칼이 보조하듯 붙어 섰다. 나는 먼저 불고기 양념을 재우기로 하고, 배를 갈 믹서기를 부탁했다. 늘 요리에 진심인 파스칼에게 용도를 설명해 줬다.
“배를 갈아?”
“네, 양파도요”
의아한 표정의 파스칼은, 껍질을 벗기고 조각낸 배가 믹서기에 떨어지는 장면을 낯선 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양파는 반은 채 썰고, 나머지 반만 갈았다. 간 배와 양파를 불고기 양념에 섞으며 말했다.
“원래 여기에 사과도 갈아 넣어요.”라고 하자
“소스 만들 때 과일을 갈아 넣는 건 처음 봐“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양념이 고기에 배는 동안 밥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잔뜩 긴장이 몰려왔다. ‘냄비 밥’ 때문이다.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에만 밥을 할 줄 알았지 냄비 밥은 거의 처음이었다. 일생에 한두 번 해본 ‘냄비 밥’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하려니 식은땀이 났다. ‘포장지에 쓰인 설명 대로만 하면 돼’ 속으로 기운을 돋궜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설명서를 꼼꼼히 읽고 시간을 엄수하면서~’ 혼자 주문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와는 달리 파스칼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다. 심지어 ‘뜸’의 개념도 알고 있다. 맞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냄비 밥은 나보다는 파스칼이 훨씬 더 많이 했을 터였다. 꽃 학교 급식 메뉴에서 프랑스 요리도 쌀을 사용한다는 걸 알았다. 요리는 토마토, 오이, 올리브, 조개와 같은 해산물, 삶은 달걀에 밥을 섞고,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 허브, 소금, 후추로 만든 드레싱을 얹은 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먹는 요리였다. 이탈리아에서 전채요리로 흔히 먹는 요리가 프랑스로 넘어온 듯했다. 그녀는 샐러드를 만들며 종종 밥을 지어봤다고 했다. 그러니 나보다 냄비 밥에 익숙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샐러드에 들어간 쌀도 낯설었지만, 프랑스 정통 간식인 쌀 푸딩이 나왔을 때 먹기가 더 쉽지 않았다. 쌀 푸딩은 우유와 설탕에 쌀을 끓이고, 바닐라와 시나몬을 더해 차갑게 만든 디저트였다. 달콤한 쌀을 씹을 때 퍼지는 이질감은 꽤 강렬했다. 쌀의 나라, 한반도에서 온 나는 나름 쌀을 잘 안다고 믿었지만, 디저트로 나온 쌀은 모래알을 세는 듯 낯설었다. 프랑스 음식에 쓰인 쌀은 전혀 다른 식재료일 뿐이었다. 내가 쌀을 이렇게 낯설게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밥이 익어가는 익숙한 냄새는 여전히 좋았다. 지금 짓고 있는 이 밥—비록 냄비 밥이라 쪼끔은 불안하지만—그 익숙한 냄새가 은근한 위안이 되었다.
도마 두 개에 채소를 나눠 썰었다. 예전 파스칼의 별장에서 함께 채소를 썰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요리는 이렇게나 써는 게 많아?!” 파스칼이 놀란 눈으로 건넨 말이다. 처음엔 왜 그렇게 놀란 줄 몰랐지만, 썰어도 썰어도 끝나지 않는 ‘채 썰기’에 놀란 말임을 알았다.
파스칼의 브르타뉴 별장에 초대받았을 때, 파스칼의 주방은 다국적 요리 대회가 펼쳐지듯 마르세유 요리, 일본요리, 한국요리가 한창이었었다. 파스칼은 주방 이곳저곳을 다니며 손을 거들었는데, 나는 잡채에 들어갈 채소를 썰고 있었다. 그때, 이를 돕던 파스칼이 채소를 썰다 말고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게 물었던 말이었다. “한국 요리는 왜 이렇게 써는 게 많아?” 그때까지 한국 요리가 썰기에 특화된 요리라는 걸 전혀 몰랐기에,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듯한 순간이었다.
프랑스 요리는 큼직한 재료를 그대로 오븐에 구워 각자 접시에서 썰어 먹는 방식이지만, 우리는 다지고 삶고 데치고 채 썰고 양념해 그저 씹고 소화만 하면 되는 상태로 음식을 내놓았다. 그런 차이를 나는 이제껏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게요. 한국요리는 이렇게 써는 요리가 많았네요?”
그 말에 문득, 도마 위에서 쉼 없이 칼질하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새벽마다 일어나 아침밥과 도시락 2개씩을 챙기며 긴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던 엄마. 엄마의 그 무수했던 시간이 이제야 또렷이 마음에 와닿았다.
불고기를 정성껏 구워 큰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지단을 솔솔 뿌렸다. 비빔밥에는 직접 가져간 고추장과 간장 소스를 곁들여 준비했다. 테이블을 세팅하던 파스칼도 음식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낯선 맛일 그녀에게 이 순간이 작고 특별한 경험이 되기를 바랐다.
“이거 기억나?” 숟가락을 놓던 파스칼이 소스 통과 수저를 흔들어 보였다.
귀국하며 파스칼에게 건네줬던 세간살이 들이다. 잊었던 세간살이들을 다시 보니 반갑다.
“우리 집에서 잘 쓰고 있어”
“세상에!”
파스칼은 그중에서도 특히 쇠로 만든 젓가락과 숟가락을 유난히 좋아했다. 금속 수저가 한국에서만 일반적인 식사 도구라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무젓가락보다는 희귀한 한국 수저 세트를 훨씬 더 좋아했다. 건너 들은 이야기로 왜 한국인들은 정작 쓰지도 않는 나무젓가락을 선물로 주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미역을 먹지 않는 프랑스인 파스칼에게 미역국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져온 블록 미역국도 함께 상에 올렸다. 큰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오색의 비빔밥과 안심 불고기가 맛깔스럽게 보여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밥이 타지도 설익지도 않아서 안심이었다. 파스칼은 배가 들어간 불고기 양념이 궁금했는지 자작해진 소스부터 맛을 보았다. 곧 ‘음—’ 소리와 함께 ‘맛있어’를 몇 번이나 말했다. 파스칼의 행복한 표정에 나도 덩달아 흡족해졌다.
불고기의 진진한 맛이 이반과 내 입안에도 맛있게 흐른다. 가을이 되어, 파스칼 농장의 배나무에 노랗게 익은 배가 맺힐 때, 그 배를 따서 불고기 소스를 만드는 파스칼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무 밑동의 낮은 가지에 달린 배들은 아마도 스쿠비 두와 싸미로부터 지켜지기 어렵겠지만. 두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