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를 달리는 덤프트럭 위로 갈매기가 날고 있다.
“저기 봐 봐! 트럭 틈 사이로 밀 알곡이 떨어지지? 그거 먹으려고 따라온 거야.”
파스칼은 앞차 위로 날고 있는 갈매기를 가리켰다. 바다에서 40km 떨어진 내륙 깊숙한 곳까지 날아온 갈매기의 여정이 호기롭게 펼친 날개를 닮았다. 속박 없이 자유롭게 먹이를 쫓아온 갈매기의 날갯짓이 바람을 타고 해방감을 전했다. 내륙 안쪽을 활공하던 갈매기의 궤적이 큰 도화지 위에 그려지다, 이내 도화지를 벗어나듯 사라졌다. 갈라지는 국도의 길 위에서, 갈매기의 힘찬 날갯짓도 점점 멀어졌다.
평원을 가르고 달리던 도로 양쪽으로, 우거진 나무숲이 나타났다.
“저 숲속에 동물이 살까요?”
“사슴, 여우, 박쥐, 담비, 토끼… 많이 살지?”
“그렇게 많이요?”, “붉은 여우도 살까요?”
“그럼” 나는 대답을 들으며 토끼를 쫓는 여우의 모습을 상상한다.
숲속에서 붉은 여우를 마주하는 상상은 유독 짜릿하다. 내내 집에 틀어져 있던 ‘동물의 왕국’과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프로그램을 보며 자란 탓일까, 이상하게도 동물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은근한 친근함이 일었다. 여우와 토끼가 분투하던 애니메이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숲을 보자, 동물들의 모습이 하나 둘 떠올랐다. 숲속 어딘가에서 우글거리는 생명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붉은 여우가 산다는 숲에 마음을 한참 빼앗긴 사이, 멀리 페로 기렉(Perros-Guirec)의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페로-기렉(Perros-Guirec)은 지역 이름인 ‘페로’와 성인 ‘기렉’의 이름을 합쳐 만든 해변 마을로, 껑땅에서 차로 약 75km 떨어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해변 휴양지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곳은 '장밋빛 화강암 해안(Côte de Granit Rose)'에 위치해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유명하다. 분홍빛 해안을 이룬 화강암 바위들이 자연이 깎아낸 조각품처럼 해변을 따라 늘어서 있다. 이 바위들은 해가 질 무렵이면 장밋빛으로 더욱 물들었다.
분홍 화강암 지대인 ‘라 그라닛 호즈(La Granit Rose)’는 제주 올레 길처럼 해안을 따라 걷기에 좋은 산책로와 아름다운 섬 경관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여유로운 하이킹을 즐기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췄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환경은 서퍼들에게 이상적이어서, 파도에 맞서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흥분의 스팟이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파도를 맞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파도의 매력에 빠진 서퍼들처럼 짜릿함을 한번 맛보고 싶지만, 실시간으로 무게중심을 바꿔야 하는, 균형감각이 좋아야 하는 운동을 잘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산악자전거와 해변 승마 같은 액티비티도 도전해 보고 싶지만, 용기가 필요한 스포츠에는 늘 지지와 박수를 보내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내게는 평생 도전의 영역 밖에 있겠지만, 산악자전거(MTB)의 놀라운 점프력과 야생의 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속도를 눈앞에서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부상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경의와 존경을 보내고 싶어진다.
성인 기렉과 관련된 순례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신앙을 따라 순례를 오는 이들도 꽤 많았다. 그래서 하이커와 서퍼 동시에 순례의 성지이기도 했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왠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마을 입구에는 가로수처럼 키가 큰 보라색 아가판사스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긴 목대 뒤로 정박한 요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주차할 곳을 찾지만, 명성만큼 이곳을 찾은 차들도 많아 마을을 한 바퀴 더 돌며 빈자리를 찾아야 했다.
마을은 수국을 담장처럼 두른 집들이 행렬을 이루고 횡으로 눈에 끝없이 담겼다. 수국마을이라는 애칭을 지어주고 싶을 만큼 소담스러운 수국이 가득했다. 마을 한 바퀴를 순회한 뒤에도 빈자리가 없어 다시 한 바퀴를 돌려던 차에, 마침 떠나는 차량의 자리에 운 좋게 차를 넣었다. 주차하는 동안에도 하이킹 배낭을 멘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쳐갔다.
마을에는 화강암이 독특한 풍경으로 점재해 있었다. 화강암이 스미듯 형성된 마을은 여느 마을과는 다른 풍광을 만들어냈다. 해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2층 호텔의 외부 계단도, 정원과 집을 괴는 자연 구조물에서도, 화강암은 이미 이 마을과 한 몸 같았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었던 페로 기렉은 브르타뉴의 고유한 모습을 간직한 채 화강암의 품에 안겨 고풍스러운 멋을 냈다.
이동식 바게트 차량이 트레킹 출발지점에서 작게 좌판을 폈다. 파스칼은 장정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식량을 쟁이듯 바게트를 사서 가방에 꽂았다. 우리처럼 바게트를 가방에 꽂고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마치 고소한 빵 냄새가 출발선을 알리는 것 같았다.
경사진 화강암 지대로 걸음을 옮기자 낮게 뜬 구름 아래로 정박한 작은 배와, 배의 반영이 한 조각의 사진처럼 나타났다. 살랑이듯 일어난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햇볕과 함께 리듬을 탔다. 햇빛이 바다 위를 반짝이며 최면을 거는 듯해, 바다를 넋 놓고 보게 했다. 해안가에 툭툭 놓아진 화강암도 자연 조형물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되었다.
“Ici, Tellement de chose à faire 여기선 할 게 너무 많아”
파스칼의 말이 본격적인 하이킹의 시작을 알렸다.
마치 ‘작은 기합’처럼 기대감이 부풀었다.
눈앞으로 동굴처럼 엮이듯 마주 자란 나무 끝으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바다의 수평선을 뒤덮은 화강암이 나무숲 사이로 보였다. 동굴 숲이 끝나는 곳에는 사람보다 높은 바위가 먼저와 성문처럼 서 있었다. 좌, 우, 위 3개의 바위가 쌓아 만든 낮은 길을 허리를 반으로 접어 지나갔다. 고개를 숙여 바위 틈 아래로 걸어 나서자, 화강암 해변이 넓게 펼쳐졌다. 바람이 요동치는 소리에 맞추어 가슴도 뻥 뚫렸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을 디딜 때마다, 나는 온 신경을 모아 조심조심 걸었다. 젖은 바위가 보기에도 미끄러워 초행길인 나는 발끝에 힘을 잔뜩 주었다. 반면 파스칼은 능숙하게 내려갔다. 누가 보면 빠릿빠릿한 하늘다람쥐를 따르는 겁 많은 너구리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영국해협 너머로 펼쳐진 바다는 파도 소리와 광풍으로 우리를 맞았다.
낮은 해변에 가까워지자, 바위를 뒤덮은 올리브색 해조류와 암석들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장대한 광경에 몸을 돌려 천천히 파노라마처럼 해변을 둘러본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이곳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파스칼은
“여기에 돗자리 펼까? 점심 먹고 올라가자.”
“네”
파스칼은 거센 바람이 닿지 않는 이곳을 피크닉 장소로 정하자고 했다. 그녀의 제안에 바위위에 돗자리를 펼쳤다.
파스칼은 만물 상자 같은 큰 배낭에서 바게트와 참치 섞은 소스, 썰어 온 채소 조각, 사과와 살구, 차와 컵 등을 꺼냈다. 나는 고저 차 있는 바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다리를 쭉 뻗고, 허벅지 식탁 위에 냅킨을 펼쳤다. 테이블 삼은 다리 위로 바게트를 올린 후, 반으로 갈라 먼저 버터를 발랐다. 그 위에 눅진한 참치 소스를 얹고, 정원에서 따온 토마토와 오이 조각을 다시 그 위에 올렸다. 그러곤 바게트를 덮어 한입 베어 물었다. 한입 넘기니 그리 시장하지 않다고 기별했던 ‘위’마저도, ‘꿀맛은 멀리 있지 않아’라는 정정 답신을 보내왔다.
바람 부는 한적한 화강암 바닷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후식 차를 마시던 우리 앞으로,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간다. 갈매기의 산책길과 다를 바 없는 이곳에 우리의 식탁과 햇살, 바람만이 오갔다.
배를 채우고 바람을 맞으며 해안을 보니, 고인 물을 터전 삼은 고동들이 꿈틀대며 전진하고 있다. 해변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바둑돌처럼 드문드문 놓여 있고, 가슴 높이까지 솟은 바위를 가득 덮은 우둘투둘한 해조류는 바위에 붙어 자랐다. 둥그런 포자와 사슴뿔 모양의 열매 몇몇은 단풍나무의 시과 열매를 닮았다. 해조류에서 자란 여러 모양의 열매들이 꽃술을 단 듯 탐스럽기까지 했다.
큰 바위들이 산포한 해변 길을 지나, 해변 예배당이 나타났다. 플루마낙(Ploumanac'h)만에 있는 기렉 성인 예배당(Oratoire de Saint-Guirec)은 4개의 기둥 위에 고딕 아치 양식을 얹은 아주 작은 예배당이다. 물이 차오르면 예배당의 절반이 잠기고 빠질 때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투박하고 거친 예배당 안쪽에는 석조로 만든 기렉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인상적이게도 기렉 성인의 코가 뚫린 채, 사라지고 없다.
“코가 없어요!”
”성인의 코에 핀을 꽂으면 남편감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그래, 하하하”
“맙소사”
정면에서 바라본 성인의 코는, 정말로 사라져 있었다. 석상 주변엔 핀 자국이 수북이 박혔다. 이렇게 짝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니.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다 헤아리긴 어렵지만, 믿든 믿지 않든 효험이라는 건 결국 믿고 보는 게 사람 마음이니 성인의 코가 뚫린 연유도 살짝 이해가 갔다. 다만 사람들의 염원이 집중된 나머지 성인의 모습을 온전히 두지 못한 게 조금 안쓰럽달까. 형체 없이 사라진 코가, 어쩌다 전해진 전설 속에서 성인의 숙명처럼 묘하게 짠했다. 코가 사라진 주변으로도 무수히 많은 핀 자국이 볼까지 번져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의 간절함이란 생각보다 대단한 힘인가 보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남편감을 찾고 있지 않은 시기에 이곳을 찾아온 건 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믿지 않아도 핀을 챙기지 못한 아쉬움이 컸을 테니. 작은 영험에도 기대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다. 성인 기렉 예배당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