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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뿔

by 에코바바


수학여행 전날, 최고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자려 애쓰는 중학생처럼, 나도 여행 당일 아픈 얼굴로 울상 짓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앞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몸 상태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날씨부터 심상치 않았다. 7월답지 않게 쌀쌀한 바람이 불고 거리엔 코트를 여민 파리지앵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나는 반팔 아래 돋아난 닭살을 쓸어내리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애써 외면했지만, 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스웨터를 입은 사람들을 지나치며 슬슬 걱정이 올라왔다. 목이 칼칼해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릴 때, 아… 진짜 감기인가 싶었다.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자맥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떠난 여행이 생리가 터져 모래성만 쌓아야 할 때의 기분이랄까. 그런 여행이라면 ‘에잇, 사진이라도 찍자’하며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그만인데, 이번 여행은 특별한 만남과 일정이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속상했다. 튼튼한 체력으로 살아오다가 왜 하필 이때?


큰 고뿔이 될까 봐 걱정하던 순간, ‘콜록’ 소리가 나왔다. 여행자의 몸 상태를 눈치챈 파스칼은 주방으로 가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쟁반에 뭔가를 담아 돌아왔다.



“이거 한번 해봐”

“이게 뭐예요?”

“기관지에 좋아. 기침에도 잘 듣고. 해보면 목이 훨씬 편해질 거야”

“지난번에 딸이랑 손주 만나러 갈 때 갑자기 기침이 나서 많이 걱정했거든? 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말이지… 손주한테 감기 옮기면 안 되잖아? 그런데 이거 하고 멀쩡해졌어”


파스칼은 내 머리에 수건을 얹어주고, 긴 깔때기를 거꾸로 겹쳐 놓은 것 같은 기구에 입을 대고 숨을 쉬라고 했다. 요법은 작은 냄비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들이마시는 방식이었다. 뜨거운 물에서 톡 쏘는 듯한 냄새가 화하게 올라왔다.


“숨을 깊이, 더 깊게 들여 마셔. 그렇지”


물이 식자 파스칼은 한 번 더 해야 한다며 물을 덥히러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냄비에 유칼립투스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용액을 3-4 방울 넣으면 돼”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이번엔 나도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증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여러 차례 들이마시며 내게도 파스칼에게 일어난 기적의 치유가 찾아오기를 바랐다.


파스칼은 자기 전, 꿀을 섞어 마시라며 피레네 산 피나무 꿀과 따뜻한 민트차를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유칼립투스 에센셜 오일은 한쪽 코를 막고 다른 쪽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라고 했다. 그러면 내일은 한결 나아질 거라고.


여행은 늘 변수를 갖는 일이라, 떠날 때의 확신은 곧 불확실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들로 채워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일은 더 나아지기를. 해가 뜨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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