껑땅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밀려드는 햇살에 눈을 떴다. 아침 정원 풍경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려 창가에 선다. 창밖에선 파스칼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나가보니 정원 앞에 테이블을 꾸미고 있다. 부스스 갓 일어난 나를 보자
“일어났어? 오늘 아침은 여기서 먹자”며 나긋한 목소리로 웃는다.
“아! 예뻐요.”
야외 테이블 위에는 정원에서 꺾은 꽃들이 화병 가득 꽂혀 있다. 소복한 꽃들 사이로 파스칼이 아끼는 장미들이 눈에 띈다.
올리브색 체크무늬 식탁보 위로 예쁜 찻잔과 치즈, 버터, 꿀, 차, 빵, 그리고 요거트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떠나는 날의 호젓한 아침은 검소하면서도 여유롭고, 또 화려하다. 꽃을 바라보며 아침을 차 한잔으로 시작한다. 홀짝이는 차의 따뜻한 목 넘김이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아낌없이 꺾어온 꽃들을 보며, 환대와 이별에 정성을 쏟은 파스칼에게 감사함을 새삼 깨닫는다.
차를 마시던 파스칼이 “우리 식사 마치고 마스크 팩 하자”라며 내가 선물한 마스크 팩을 제안했다. 그러곤 뒤로 제쳐지는 의자를 곧장 가져왔다. 나는 파스칼을 뒤로 눕게 하고 파스칼의 얼굴 위에 접혀 있던 에센셜 팩을 곧게 펴서, 살포시 올렸다. 촉촉한 팩이 피부에 착 감겼다. 그 차가운 느낌에 파스칼이 움찔했다. 나도 같이 놀라 둘의 어깨가 동시에 소스라쳤다. 작은 팩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우스워 함께 깔깔 웃었다. 나도 얼굴에 팩을 올리고 나란히 누웠다. 파란 하늘과 햇살, 파라솔 그늘에서 함께 20여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에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우짖는 새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파스칼은 마스크를 하다 뭔가 생각난 듯이
“떼지 말고 있어봐, 발레리에게 우리 사진 찍어 보내게”
라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찍은 사진을 보니, 흰 가루를 뒤집어쓴 얼굴이 의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새하얬다. 그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비장함 대신 함박웃음으로 가볍다. 학교 급식 원년 멤버인 발레리에게 오랜만에 전하는 소식이 토속적인 분장 사진이라니… 메시지를 보내는 파스칼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발레리를 생각하니 나도 익살스러운 웃음이 났다. 파스칼이 전송한 메시지에는 분명 그녀의 넘치는 흥도 담겼을 것 같다. 팩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즐겁게 야단을 떨며 까르르 웃던 소녀 시절처럼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때엔 그게 그렇게도 웃겼다.
마스크를 벗은 우리는 마무리로 얼굴에 헤이즐넛 오일을 바르고 나란히 앉았다. 오일이 스며들 때쯤, 파스칼이 집으로 들어가 네모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이 앨범, 지난번에 손주가 와서 함께 여행했을 때 찍은 사진들로 이반이 만든 거야."
라며 첫째 딸이 만든 가족 여행 앨범을 펼쳤다. 파스칼은 캐나다로 이민 간 둘째 딸이 손주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세 딸과 가족 여행을 떠났다. 브르타뉴의 자연 속에서 캠핑하고 손주들과 거니는 사진들로 메워진 앨범을 보며, 이방인도 금세 추억 여행에 빠져들었다. 부록으로 브르타뉴의 명소들이 품은 풍성한 자연과 바람, 풀꽃들, 바다 내음, 파란 하늘도 함께 여행한다. 그 안, 머문 시간 속의 사람들은 그저 아름다웠다. 앨범은 ‘가족여행’이라 쓰고 ‘사랑 여행’이라 읽혔다.
나는 떠나기 전 정원을 한 번 더 둘러보려 나섰다. 고양이 티미가 농장 앞에서 잔디에 파묻히듯 폴짝이며 쥐를 잡고 있다. 앞발을 잔디 사이에 넣고 흔들며 수색한다. 보니 아주 작은 쥐가 잔디 사이를 세차게 뛰어오르며 달린다. 황급히 쫓기는 녀석에 다가가 보니 아주 작고 앙증맞은 쥐다. 설치류는 칠색 팔색이지만,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이 쥐는 귀엽기가 쥐 대표급으로 깜찍하다.
티미는 앞발로 살짝씩 건드리면서 데리고 노는 것 같지만 작은 쥐의 벌벌 떠는 모습이 가엾다. 얼른 도망쳤으면 싶던 순간, 쥐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놀라움도 잠시, 녀석은 빠르게 내 양 신발 사이로 파고들어 와 멈춰 서서 숨을 할딱였다. 내 공간에 안착한 쥐를 보자 티미는 흥미를 잃은 듯 기다리다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 갑자기 내 심장이 벌름거리다 서맥으로 뛰었다. 내가 뛰어온 것 처럼 긴장이 툭 하고 풀린 탓이다. 매일 이렇게 쫓기듯 살아야 한다면… 심장병이라도 걸릴 것만 같은 동물의 세계다. 내일, 쥐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는지…
성묘는 하루 12마리의 쥐를 잡아먹어야 하루에 필요한 열량을 채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티미는 파스칼이 먹이를 주더라도 재미로 사냥을 계속할 듯했다. 누구에게는 아침의 소일거리지만 누구에게는 생존의 위협이 되어, 눈뜨면 끝없이 바쁜 험난한 삶이 됐다. 추격 묘 티미가 멀리 떠나고, 숨을 몰아쉬며 지쳐 있었던 쥐도 사라지자, 나도 자리를 벗어났다.
농장 앞 분홍색 부들레야 나무에 나비들이 가득하다. 큰 관목으로 자란 부들레야는 butterfly bush 나비 덤불로 불릴 만큼 나비를 불러모았다. 동그란 눈동자 모양을 가진 공작나비, 흰색 점 문양과 주황색 긴 무늬가 있는 붉은 제독 나비 등은 마치 뷔페에서 취향껏 음식을 담는 손님처럼 이 꽃 저 꽃 옮겨 다닌다. 나비들의 넘치는 사랑에 부들레야는 나비들이 앉았다가 일어날 때마다 통통 퉁겨지고, 살랑이는 바람에 긴 꽃대가 흔들리면서 아침 운동을 했다.
벌새가 좋아한다는 자줏빛 매엽죽이 아래로 늘어지듯 꽃을 피웠다. 꿩이 뜯어 먹기 좋아한다고 해서 ‘꿩베리’라는 이름도 붙었다. 우리나라의 ‘덜꿩나무’도 꿩이 좋아하는 열매가 달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세상 어디서나 작명 센스는 열매를 자주 찾는 동물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만국 공통의 이름 짓기 방식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정원 옆 농가주택을 휘감고 있는 화분들 사이로 꽃대 길이만 50cm가 넘는 아가판서스가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고 긴 타원형의 연 푸른 꽃잎을 길게 피워내고 있다. 꽃은 지고 수염이 난듯한 열매를 매단 니겔라와 제라늄, 폭신폭신해서 만지고 싶은 흰색 라그라스, 남천, 후쿠시아, 사랑초, 호야, 다른 색의 수국과 장미 등도 토분과 돌 화분에서 살고 있다. 파스칼은 레몬꽃 향기를 맡으라며 나를 불렀다. 나는 얼른 꽃에 코를 가져가 본다.
“레몬꽃 향기 어때?”
“아! 꽃이 거의 졌는데도 냄새가 좋아요”
꽃잎이 반쯤 떨어져 나간 아주 작은 꽃에서도 향은 싱그러웠다. 이 와중에도 파스칼은
“아! 이 애벌레”
를 외치며 벌레를 잡았다. 파스칼은 10여 년 전 노모의 정원을 우리에게 소개해 줄 때도 ‘아! 슈늬이(chenille)!‘ 한숨을 쉬며 애벌레를 잡았었다. 나는 그때와 똑같은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파스칼은 농가주택 한 편에 말린 라그라스 다발과 니겔라 씨방다발 등을 걸어 두었다. 풍성한 다발들이 시간의 때가 묻은 돌 위에서 멋지고 수수한 장식이 됐다. 서양 망종화(Hypericum androsaemum 하이페리쿰)가 바람에 한들거리며 우아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별의 시간을 준비했다. 나는 이반에게
“좋은 방을 내어줘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이반은 “언제든 내 집처럼 놀러 와” 라는 고마운 대답을 해주었다. 손을 흔들고 정원과 베란다가 예쁜 집과 멀어졌다. 빨간 우체통을 마지막으로 집과 안녕했다.
역으로 가기 전, 파스칼과 함께 동네 맛집 피자집에서 피자 한 판씩을 사 들고 껑땅 성이 보이는 호숫가로 갔다. 트렁크에 실린 야외 의자 2개를 꺼내 와 껑땅 성이 마주 보이는 호수가에 의자를 펼쳤다. 먹음직스러운 따뜻한 피자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음료수 잔을 부딪치며 ‘친친’ 한다. 우리는 성의 고요한 위엄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피자를 먹으며, ‘다시 만나서 좋았어’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호수가 잠긴 성의 웅장한 실루엣이 잔잔한 물결에 반영을 이루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남은 시간 동안, 파스칼은 자신이 일했던 플라워 숍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샵은 기차역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파스칼이 일했던 플라워 가게는 밖에서 보기에 정갈하고 말끔했다. 나는 눈썹 위에 기역자 손차양을 하고, 유리에 이마를 대고 쇼윈도 너머 진열된 식물들을 들여다보았다. 파스칼이 꽃을 다루던 작업대와 포장 리본들이 보였다. 그녀가 일했던 장면들이 보이는 것 같다. 그녀는 분명 꽃을 만질 때마다 콧노래를 부르며, 포장을 마친 부케와 바구니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선물을 건네듯 꽃을 손님에게 건넸을 것이다.
샵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파스칼이 점심을 먹고 자주 시간을 보냈다는 근처 정원(Jardin de Carmélie)까지 걸었다. 정원엔 분홍 노랑이 섞인 알스트로메리아가 한창이다. 넥타 가이드가 여느 꽃보다 뚜렷한 알스트로메리아가 이곳에선 마치 들꽃처럼 수수해 보이는 것이, 공원 곳곳에 놓인 강렬한 빨강 의자 색깔 때문인 듯했다.
산책하기 적당한 규모의 공원은 가장자리에는 나무가 중앙 화단에는 아기자기한 화초와 허브정원이 테마를 이뤘다. 함께 걸으며 잎사귀가 톱니바퀴처럼 생긴 생경한 나무를 보자 파스칼이 멈춰 서서 구글로 이미지 검색을 한다. 멜리안투스 메이저Melianthus major L.다. 남아프리카 원산의 이국적인 식물로, 식물의 모든 부분이 유독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공원 식물로는 어울리지 않은 식물이 있는 건, 오래전 이곳에 심겨서인 듯했다. 공원에서 우리는 자줏빛 꽃의 매엽죽 (Leycesteria formosa), 수국,아스트란티아, 펜스테몬penstemon cobaea, 구주물푸레Fraxinus excelsior 열매, 장미 모양의 솔방울들도 만났다. 꽃나무와 높은 침엽수들 사이에서 우리는 호젓한 망중한을 보냈다.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공기 속에 묻어나는 따스함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밝은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날 때를 정하지 못한 나는 파스칼에게 깊은 미소를 남기며 기차에 올랐다. 우리의 순간은 짧았지만, 추억으로 또 다른 희망을 쌓고 떠난다. 안녕! 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