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오기 전, 어학원에서 만났던 은이와 연락이 닿았다. 파리에 간다는 말에 “언니 저 파리에 있어요!”라는 대답에 내가 더 많이 놀랐다. “어떻게 거기 있어요?” 한국에서 착실히 회사생활만 하는 줄 알았던 은이였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요. 언니!” 서로 깜짝 놀란 우리는 파리에서 급 번개 약속을 잡았다.
10여 년 전, 파리 가톨릭 어학원에서 만난 은이는 불문과 학생으로 나와는 띠동갑 이상의 차이가 났다. 그 시절의 사람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은이가 다시 파리에 와 있다니… 나는 기적처럼 그 장소에 돌아와 있는 그녀를 우리가 만났던 곳에서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학원이 있던 파리 6구를 약속장소로 잡았다. 장소를 물색하려던 순간,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레스토랑 후보군의 사진과 메뉴들이다. 와인바,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시안 푸드 등 먹음직스러운 사진들이 연이어 쭈르륵 올라왔다. 그녀의 빠른 식당 후보지 선정에 놀란 것도 잠시, 마치 늘 그렇게 만나왔던 사이처럼, 우리는 빠르게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풋풋했던 서울 소녀였던 그녀가 이제는 완연한 파리지엔느가 된 듯 속도감 있는 메뉴 선택이다. 다시 돌아와 맛집을 꿰찬 듯이 보이는 그녀에게서 현지인 느낌이 물씬 났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녀가 어찌 된 영문으로 여기 와있는지 셀렘만큼 궁금함도 같이 차올랐다. 한국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은이를, 파리에서 다시 만나다니… 기분이 묘했다. 모두 떠나버려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파리 땅에서, 빛나는 초록 새싹 하나가 얼굴을 내민 듯한 기분이다.
10호선 마비용(Mabillon)역에 나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방향의 신호등 앞에 섰다. 멀리 큰 키의 은이가 보인다. 올블랙의 시크한 모습이 예전 그대로다. 신호가 바뀌어 건너는 길에 격한 반가움이 올라왔다. ‘아! 근래에 누군가를 만나며 쉬이 이런 마음이 들었던가…’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이 내게도 참 반가웠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둘은 보자마자 반가움에 얼싸안았다. 익룡 두 마리가 날개를 펼쳐 안고, 거리에서 고주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니 하나도 안 변했어요”, ”자기도!”
“어떻게 여기서 만나요?!” “그러니까요!!
반가워요~!”
5, 60대의 동창회에서 난무하는 말, 하나도 변치 않았다는 말이 분명 진실은 아닐 텐데 분명 우리 눈엔 진심의 ‘그대로’였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어떻게’, ’진짜’ 라는 멘트를 날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야외 테라스의 가득 찬 손님들만으로도 생제르맹데프레 대로변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맛집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메뉴로 이탈리아 정통 오징어링 요리와 피자, 맥주 한 잔씩을 주문했다. 거품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온 맥주잔을 받아 들고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잔을 ‘짠’ 부딪혔다. 꿀떡꿀떡 시원한 목 넘김을 하자마자, 기다려왔던 썰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나는 다들 공부하고 떠나서 누가 남아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진짜 너무 반가워요!”
“그러니까요. 저도 언니를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반가워요!”
은이는 회사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우연찮게 올해가 워킹 홀리데이를 지원할 수 있는 ‘마지막 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비자를 신청할 기회가 닫히기 전, 그녀는 고민하기보단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문턱에서 기회를 잡아 작년에 다시 이곳에 왔다.
그녀가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은 프랑스 스타트업 디자인 회사로, 웃으며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해 들려줬다.
“운이 정말 좋았어요! 대표님 성격도 좋고 근무 환경도 좋은 편인 것 같아요. 지금 상품 디자인 일하면서 하고 싶었던 수작업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워요!“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링크를 보내며 설명을 도왔다. 회사는 파리지앵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수작업 기념품 샵으로,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스타트업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일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어 보였다. 도자기, 섬유 등에 그려진 그림들에서 혹시 그녀의 손길이 닿은 소품은 없는지도 보게 됐다.
“인생 진짜 재미져요. 다시 파리라니!”
“그죠!”
돌아온 자도 우연히 파리를 들른 이도, 상상하지 못한 해후 속에서 우릴 계속 웃게 했다.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은이의 밝디밝은 모습이 좋았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에, 보는 이마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세상에는 어디서든 빛을 내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발산하는 반짝임에 이끌려 다가가면 늘 희망찬 기운이 그 안에 있었다. 어디서든 그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늘 꿈이 닿도록 애써 온 은이였다. 그래선지 그녀가 지금 프랑스에 와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분명 필연이었다.
쌀쌀해진 바람과 살짝 오른 취기로, 우리는 어학원까지 걸었다.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짧은 일화를 소소하게 나눴다. 그 시절의 사람을 다시 스칠 수 있었던 섬광 같은 행운에 마냥 기쁜 하루였다. 나는 대학원 입학 서류를 준비하러 4호선 생 쉴피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은이와 그곳에서 헤어졌다.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안개 속에서도 밝은 길로 들어서는 은이와 헤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변함없이 무척 열심이다.
사라지고 없을 것 같던 시절의 인연을 마주하고 어학원 거리를 다시 혼자 걷는다. 쌀쌀했던 바람도 어느새 유순해진 저녁이다. 잊고 있던 시간이 저녁 공기에 조용히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