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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와 걷는 사람

by 에코바바


한 손은 유모차를 밀고, 다른 손엔 깍지를 낀 채 담배를 문 임산부가 지나간다. 유아 학교 정문 앞에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중년 여성이 사선으로 담배 연기를 뿜고 있다. 이 애연가는 등교하는 아이 학부모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당당히 흡연하며 아이들을 맞는 그녀는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만 3세에서 5세까지의 아이들이 다니는 에꼴 마떼흐넬 앞에서 골초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천연한 인사가 어쩐지 나에게만 이상하다. 내가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지극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익숙하던 세상에서 완전히 멀리 와 있다는 것만은 더 분명해졌다. 2012년 2월, 나는 낯선 프랑스 땅에 아이와 첫발을 내디뎠다. 전연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는 삶이 두려웠지만, 새롭게 알아갈 날들에 대한 설렘 또한 일고 있었다. 결이 다른 삶이 궁금해졌고 다름 속에서 살아낼 힘을 키워내 보고 싶었다. 그때 숙이의 부고가 전해졌다. 숙이를 만나고 온 지 고작 3개월이 지나서다.


프랑스에 출국하기 보름 전, 사회 초년생 시절 함께 숙소 생활을 했던 숙이에게 전화가 왔다. 충주 고향집에 내려가 있던 숙이가 갑자기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는 것이다. 결혼 후에는 거의 연락하며 지내지 못했던 숙이인데, 서울까지 와서 자고 가겠다니… 난감했다. 가재도구들을 정리한 후라 비루한 세간살이로는 누굴 대접할 상황이 못 되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다녀와서 보자"라는 말에도 친구는 힘주어 ‘오겠다’라고 말했다. 친구를 거절할 수 없어 수락했지만, 나는 좀 퉁명스러운 대답을 했다.


유방암이 재발해 다시 항암치료에 들어간 숙이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오가며 기운을 쓰는 일에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약속한 날, 숙이는 암을 앓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말간 얼굴과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리 집에 왔다. 환자라는 얘기를 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숙이를 현관에서 맞으며 나는


"다녀와서 보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올라와”, ”쉬지"

라는 말을 보탰다. 숙이는

"그땐 그때고, 가기 전에 봐야지~" 하며 신발을 벗었다.


나는 간단한 저녁밥을 차리며, "먼데, 고생스럽게 왔어."라는 볼멘소리를 했다. 애써 올라온 친구의 고단한 발걸음이 미안해서였지만, 군더더기 같은 말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고향에 내려가 엄마와 함께 지내는 얘기를 나누다, 답답하지는 않은지 물었다. 숙이는 별 대답이 없다가 "글치 뭐"라고 했다. 정작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는 묻지 않았다. 엄살이 없는 숙이도 아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숙이는 나와 얘기를 나누는 내내 큰 눈망울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말하는 내 얼굴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둡고 이슥해지자 나는 이부자리를 폈다. 어린 아들과 나 그리고 숙이, 우리 셋은 한방에 나란히 누웠다. 조용한 밤이었다. 숙이는 잠이 오지 않는지 그 후로도 한참을 잠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이상한 밤을 보냈다. 그런 3개월이 지난 지금, 그녀가 하늘로 갔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식에 그저 멍했다. 친구는 젊었고 아름다웠고, 너무도 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친구를 넘어설 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병이 친구를 이리 쉽게 데려갈 수 있다고 나는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병은 진정 무서운 것이어서 지친 숙이를 삼켰다.


나는 미련스러울 만큼 바보스러워, 죽음을 예단치 못하고 연거푸 숙이까지 친구 둘을 잃었다. 안일한 이별이었다. 마지막 일 거란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했다면, 나는 그토록 간소한 밥상은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와서 진짜 맛있는 밥 먹자”라는 허황된 얘기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철없음으로 인해 덤덤한, 우리의 마지막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라 해도, 내내 제대로 차려주지 못한 밥상이 마음에 남았다. 연이어 반복된 회한이 밀려왔다.


나는 파리의 회색빛 건물 아래로 계속 걸었다. 한탄과 후회, 챙기지 못한 미안함, 함께 밝게 웃던 날들이 마음속을 오갔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떠난 친구들을 대신해 신을 원망하고 성을 내며 아르렁거리며 걸었다. 그러다 다시 구원을 갈구하고, 앗아간 것들을 원망하며 불평하다 다시 신에게 그들의 안녕을 빌었다.


아름다운 생을 빼앗긴 젊은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을 쉽게 추스르기는 어려웠다. 삶을 이르게 마감한 옥이에 대한 생각은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마음을 짓눌렀다. 숙이는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한동안 오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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