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번역기 앱을 켜고 벼락 치듯 텍스트를 쏟아 넣는다. 친구 꺄미 대신 까미의 남편 아르노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서다. 낯선 만남을 가질 생각에, 조용한 기차 안에서 마음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듯 혼자 분투 중이다. 불편한 상황을 면하려면 스몰 토크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요’, … 왠지 어색하다. 뭐라 인사하지…? 첫 만남이 다가오고 있기에 심장이 두근댔다.
안면이 없는 친구 남편이라 멋쩍은 만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쉽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성향만은 바뀌지 않아, 외려 내가 그러하다는 걸 오랜만에 확인하는 자리 같다. 나는 양 엄지손가락으로는 한국어-프랑스어 번역기 자판을 두드리고, 마른 입으로는 번역된 프랑스어 문장을 작은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다행히 서서히 긴장도 풀려갔다.
“쿠쿠(CouCou)! 14시 13분 기차 맞지?“ 꺄미가 보낸 문자다.
“내가 마중 나갈게~!“
근무 중이었던 꺄미가 근무시간을 조정해 마중을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의 문자다.
‘와우!’ 나는 조용한 기차 안에서 소리 없는 쾌재를 불렀다.
꺄미의 마중으로 긴장과 우려, 어색한 공기는 단번에 말끔히 사라졌다.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고 기분도 한결 청정해졌다. 그제야 기차 밖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밀밭의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햇살은 전원마을의 지붕과 나무, 작은 물줄기들을 비추며 반짝였다. 띠리링
“우리 저녁에 같이 산책할래? 내가 아주 좋은 산책코스를 알거든. 강아지도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함께 산책하는 거 괜찮아?” 나는 친구 강아지의 성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물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답했다. 그녀는 강아지가 점잖다며 날 안심시켰다.
“그런데 말이야… “
“응”
“사람들이 내 강아지를 자주 무서워해.” 나는 순간 긴장했다.
“왜?”
“왜냐하면 투견하고 닮았거든...”
”아…?”
나는 얼핏 SNS에서 본 어린 힙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종전에 갖은 긴장감은 금세 성장한 힙스의 외형이 주는 긴장감으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친구를 믿고 ‘좋아’라고 답했다. 대신 조금 거리두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라발(Laval)이 고향인 까미는 마옌주(Mayenne)의 코뮌(commune)인 샹제(Changé)라는 곳에 신혼집을 꾸렸다. 라발은 프랑스 서부 페이드라루아르 지방 마옌주의 주도로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져 있다. 샹제는 마옌주의 기초 지자체 코뮌 중 하나로, ‘풍부한 역사 문화유산 덕에 예술과 역사의 도시 인증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리넨 산업과 유제품 산업이 발달했다’라고 포털사이트는 소개했다.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서야 꺄미가 사는 곳의 정보를 훑고 있었다.
가만있자, 그럼 꺄미는 이제 어떻게 불리지? 프랑스에서는 특정 지역 사람들을 부르는 별칭이 있었다. 지명 기반의 주민명사 장띨레(Gentilé)를 흔히 사용했는데, 라발에 사는 사람들은 남자를 라발루아(Lavallois), 여자를 라발루아즈(Lavalloise)로 불렀다. 파리 남자는 파리지앵(parisien), 여자는 파리지엔느(Parisienne), 내가 살던 앙제에서는 여자를 앙주빈(angevines), 남자를 앙주방(angevins)으로 불렀다. 작은 도시인 샹제도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남자는 샹제알레Changéalais, 여성은 샹제알레즈(Changéalaise)라 불렀다. 이제 꺄미는 샹제알레즈가 된 것이다.
전라도민, 경상도민, 서울 시민처럼 지역 주민을 통칭하던 익숙한 방식과 달리, 주민 명사를 남녀로 구분해 부르는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 꽤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장띨레를 쓸 때, 어떤 이는 최소 1년 이상 그 지역에 산 사람이 아니면 주민명칭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그 또한 자부심으로 여긴다는 점이 다소 놀라웠다. 프랑스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지역색을 담은 이 독특한 명명법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강한 소속감과 자부심의 표현법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단순한 호칭 이상의 정체성으로 다가왔다.
미끄러지듯 조용히 라발 역 선로에 정차한 기차에서 나는 플랫폼에 캐리어를 내리며 다가오는 해후의 시간만큼 가슴도 벅찼다. 라발은 작은 소도시답게 아기자기한 역사가 있었다. 박공지붕 건물을 중심으로 양측에 건물이 균형감 있게 자리 잡았다. 역사에 들어서자 꺄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뛰듯이 캐리어를 들고 달려가 그녀를 꼭 안았다. 양쪽 뺨을 맞대는 인사, 비쥬를 나누고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웃었다. 긴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다. 이렇게 다시 마주한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뿐이었다. 우리는 역 근처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 말보다는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며 웃기 바빴다. 꺄미의 고향에서의 해후가 나에게도 꺄미에게도 믿기지 않은 웃음이었다.
노면에 주차된 꺄미의 차로 걸어가면서, 우리가 타던 싹쏘가 아니라는 사실에 괜스레 혼자만 아쉬워졌다. 캐리어를 실으면서 트렁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강아지 힙스를 발견하곤 ‘안녕!’하고 인사했다. 힙스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만 살짝 주억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힙스는 점잖았고 생각보다 훨씬 차분한 모습이어서 안심이 되었다. 얼굴도 몸도 다부진 힙스는, 꺄미가 사는 샹제까지 가는 내내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차는 마옌(Mayenne)강을 가로지르는 라발의 고가교(viaduct de Laval) 아래를 지나갔다. 9개의 반원형 아치와 길이 180m, 높이 25m에 달하는 고가교는 풍경에 마지막을 완성하는 한 피스의 퍼즐 조각처럼 강폭에 얹어져, 그렇게 구조물을 넘어선 풍광의 한 부분이 됐다. 높은 고가교에서 강과 그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더 멋진 전망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도 스쳤다. 고가교의 아치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며, 우회해서라도 달리고 싶은 도로라는 느낌도 들었다.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면서 마른 꺄미가 보였다. 원래도 살이 없던 꺄미였지만 많이 수척했다. 손이 많이 가는 나이대의 아이를 키우면서 살이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삐쩍 마른 모습에 불쑥 말이 나왔다. “너 너무 말랐잖아!” 꺄미는 웃으면서 “응~ 근데 나는 한 번도 살쪄본 적이 없었어”라며 웃어 보였다. 그저 마음이 짠했다. 엄마의 숙명이란, 마른 가지가 되어가는 것이라지만…
그러고는 “못생겼어?”
하고 한국말로 물었다. 꺄미의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너 그걸 어떻게 기억해?”
꺄미가 싱글벙글 놀리듯이 웃으며 신나 했다. 내가 처음 알려준 한국말이었는데… 하필 많은 말 중에 그 말을 기억하다니…
미에 대한 기준치가 높았던 꺄미는 실기 때 잘하면서도 Il est moche(별로야, 안 예뻐)라는 말을 곧잘 했다. 옆 분단에서 작업하던 내게도 그녀의 푸념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으므로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뒷좌석에 실린 꺄미의 작품을 보면서, “예쁜데 뭐가 못생겼다는 말이야?”라며 되받아 말하곤 했다. 그녀는 ‘미(美)’에서만큼은 확고한 자기 취향이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추구 미를 인정해야 했지만, 나는 꺄미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작업이 오히려 내겐 흥미로웠다. 꺄미는 다양한 오브제를 뒤섞어 보는 실험을 자주 했고, 동시에 좋은 색 감각도 갖고 있었다. 평소의 꺄미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사용하는 유일한 부정어가 Il est moche 였지만, 작품을 할 때만큼은 유독 그 표현을 자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Il est moche’를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물어왔고, 그때 내가 가르쳐준 첫 한국어가 ‘못생겼어’였다. 그 후로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들처럼 꺄미는 못.생.겼.어! 를 즐겨 말했다. 자신의 주근깨를 탐탁지 않아 할 때에도 한국말로 ‘못생겼어’라고 외치곤 했다. 나에게는 귀여운 빨간 머리 앤 같은 주근깨였지만… 그때 가르쳐 준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내 표정을 본 꺄미는 또 웃어 죽겠다는 듯 연신 방긋 웃었다.
20여 분을 달려 베이지색 도시 샹제에 들어섰다. 꺄미의 도시답게 동네는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녀의 성정과 잘 어울리는 도시다. 꺄미의 집은 세월이 느껴지는 고즈넉한 고택으로 옆에는 큰 과수 농장이 딸려 있었다. 고택과 옆 건물 사이로 난 공터를 주차장 삼아 너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힙스가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꺄미는 먼저 힙스를 번쩍 안아 거실 안쪽에 내려주었다. 점잖던 힙스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려주자마자 전속력으로,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점잖은 척했지만, 무척 답답했던 힙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