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과 감당할 수 없는 친밀감을 떠안겨주는 동물들
햇살에 눈을 떴다. 라 그라닛 호즈(La Granit Rose)에 가는 날이다. 어제저녁엔, 파스칼이 걷는 산책길을 따라 공원과 서점, 성당, 성을 걷고서 노곤함에 취해 잠들었다. 빛줄기가 들어오는 창문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며 방을 나선다.
야외 베란다 난간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던 티미가 꼬리 끝을 말아가며 시계추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다. “티미”, “티미~” 티미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며 인사를 건네 보지만, 티미는 내 말도, 파스칼의 말도 듣지 못한 척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다 파스칼의 “Tu veux aller au dehor? 밖에 나갈래?“라는 말에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선택적 반응이 새침하다. 이반이 열어준 문틈 사이로 티미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꽃 학교 시절, 파스칼의 집에 곧잘 찾아오던 고양이가 있었다. 동네 고양이는 파스칼의 붉은 지붕 집을 마치 제 집인 양 들어와 옆에서 졸다가 놀러 나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파스칼의 주말은 고양이와 햇살을 나누고 비스킷과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마실 다녀온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잘 놀다 왔어?”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주변의 다른 고양이들도 아픈 곳이 없는지 쓰다듬으며 두루 살폈다. 지금은 가족이 된 티미와 함께 그 시절을 닮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 위로 여러 개의 요거트가 올라왔다. 처음 프랑스 마트에서 놀랐던 그때처럼, 오늘도 요거트 종류가 다양했다. 초콜릿, 레몬, 체리, 시리얼 요거트 등 이곳에선 뭐든 요거트에 한번씩 넣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좋아하던 진한 초콜릿 요거트를 한 스푼 떠 입안에 넣었다. 시원한 요거트 안에 쌉싸름한 카카오가 녹아든 맛이다. 묵직한 진한 맛이 좋다. 검은 밀빵에 버터를 바르고, 대황(rhubarb) 잼을 듬뿍 발라 한입 베어 물었다. 물컹한 잼이 시큼하면서도 달아 ‘맛있어요’라는 말이, 오물거리며 먹는 소리에 물려 절반만 새어 나왔다.
‘Confiture Rhubarbe 2022’ 라벨이 붙은 대황 잼 병에 파스칼이 직접 쓴 글씨가 적혀 있다. 어제 정원에서 스치듯 지나친 대황 줄기로 만든 잼이다. 껍질을 벗겨 만드는 대황 잼은 부드럽고 가벼운 산미가 있어 산뜻한 맛이 났다.
대황 줄기는 윈저앤뉴튼 물감의 퍼머넌트 로즈와 오페라 로즈를 섞은 색과 닮아 꽃만큼이나 화려하다. 색감이 발랄하고 화사해서, 이 색을 볼 때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열대우림에서 길을 잃어 막막한 때라도, 이 두 색을 보게 된다면 나는 곧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식물을 만날 때면 원산지를 찾아보곤 하는데 대황은 중국 서장과 청해 지방의 산골짜기의 습지에서 자랐다. 습지에서 자란 걸 보면 물을 좋아하는 아이인 모양이다. 내가 냠냠대며 먹는 통에 파스칼이 만든 잼이 줄어들고 있었다. 입이 바빠질수록 파스칼의 잼도 계속 줄어갔다. 멀리서 온 내가, 결국 파스칼의 대황잼을 야금야금 축내고 말았다.
전에 꽃 학교 친구 오헬리 집에서 맛봤던, 꽈리 속 동그란 열매로 만든 잼도 풍미가 좋아 자꾸 손이 갔었다. 그때도 ‘여기선 정말 다양한 채소와 열매로 잼을 만드는구나’ 싶었고, 잼 문화가 이 정도면, 모든 재료 OK, 재료 is 뭔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웬만한 재료는 그냥 ‘한번 넣어보자’ 쪽으로 결론 나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내가 잼을 얼마나 잘 먹었는지, 귀국 후 오헬리는 직접 만든 포도잼과 살구잼을 한국으로 보내왔다. 그때도 맛이 좋아 바게트에 몇 번을 더 덧발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잼에 너무 많은 식탐을 보였던 것은 아닐까 싶어 살짝 창피스럽기도 하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맛에 감탄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과일과 파인애플주스, 마지막으로 얼그레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숙취 뒤에 먹는 순댓국 국물처럼, 줄기가 목 안을 뜨겁게 타고 내려간다. ‘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속이 시원했다. 출산 후 미역국 대신 보통식인 피자를 먹고, 해장할 때 해장국 대신 차를 마시는 일처럼, 나라별 일상의 문법은 달라도 종종 유사한 인상을 받곤 한다. 여행 중, 문득 비슷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출발 전에 파스칼이 키우는 염소를 보러 집 뒤편에 있는 농장 터로 나섰다. 검정 얼룩과 브라운색 얼룩 염소다. 아침 인사인 줄 아는 듯, 녀석들이 축사에서 걸어 나왔다. 문 앞까지 마중 나온 브라운색 얼룩 염소가 먼저 “음매~” 한다. “잘 잤어?” 경쾌하게 ‘음매’ 다시 회답한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인사를 받는 듯해 시작이 좋다. 때마침 들려오는 목청 좋은 새 소리도, 산들바람이 해주는 바람 세수도 기분을 달게 했다. 뒤에서 웃고 있던 파스칼에게
“얘네 이름이 뭐예요?” 물었다.
“스쿠비 두 그리고 싸미, 검은 얼룩이 스쿠비 두, 숫컷 그리고 브라운 얼룩이 싸미, 암컷 ”
“하하. 진짜요?”
이름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 스쿠비 두와 싸미는 미국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로 스쿠비 두는 겁 많은 강아지, 싸미는 더 겁이 많은 십 대 소년 캐릭터다. 무서운 괴물이나 유령을 보고 매번 혼비백산하는, 영웅과는 먼 캐릭터들이다. 재밌게도 이들은 사건 속 미스터리를 의도치 않은 방법으로 해결하곤 하는데, 그야말로 덤 앤 더머(Dumb and Dumber) 같은 환상의 콤비다. 스쿠비 두는 미국식으로 스쿠비 두 그대로 불렀지만, 섀기는 프랑스 이름 싸미로 이름이 바꿔 불렀다.
파스칼이 두 녀석을 너른 농장 풀밭으로 데리고 나오자, 싸미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살짝 무서웠지만 다행히 금방 적응이 됐다. ‘머리로 받으면 어쩐다?’ 싶었는데…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알고 한번 쓰다듬으니 두려움은 금세 가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덩치로 보면 사람이 훨씬 큰데, 무서우면 동물들이 더 무섭지, 사람보다 덜 무섭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용기 내준 동물들이 고마웠다. 스쿠비 두도 경계를 풀고는, 이내 호기심에 다가왔다.
파스칼이 두 녀석을 막대기에 매어둔다. 줄은 10미터를 너끈히 넘었다. 비거리가 상당한 데도, 줄은 계속 꼬였다. 둘이 사방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인 탓에 꼬인 줄은 풀려도 다시 꼬였다. 스쿠비 두와 싸미는 풀밭을 신나게 휘저으며 사고뭉치처럼 달리 가려고 분투했다.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계속 달랐다.
그러다 너른 풀밭에 심어진 나무의 늘어진 가지 끝을 향해 폴짝 이듯 달린 잎들을 따 먹기 시작했다. 점프력에 먹성까지 좋아 나무 끝단에 달린 잎사귀들은 이미 사라지고 휑뎅그렁했다. 지켜보니 사방에서 풀을 뜯고 다니던 녀석들은 꼬인 줄을 풀어주기가 무섭게 계속 줄을 꼬고 다녔다.
헝클어질 대로 얽히고 꼬인 줄을, 파스칼은 고투하며 막대기를 당겨 뽑았다. 줄이 풀리면 홀가분해지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파스칼이 힘을 쓰며 상황을 해결할 때만큼은 스쿠비 두와 싸미도 얌전히 파스칼의 뒤를 지켰다. 기를 써서 뽑아내는 광경을 순한 눈을 하고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막대기에서 고리 줄을 빼내어 다시 꽂으며 갈피가 잡히자, 스쿠비 두와 싸미는 ‘음매엥에에에~’ 목청을 뽐내며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흩어졌다. 교차하듯 얽힌 줄을 풀어내는 일이 파스칼의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