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함께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스물두 살, 동생과 함께 ‘쉐어하우스 디웰’에 입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우리보다 약 6개월가량 먼저 입주한 디웰하우스 봄통의 입주민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내게 전문적인 커리어우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 당시 그녀는 LiNK(Liberty In North Korea)라는 비영리 단체를 다니고 있다고 했고, 탈북인들의 정착과 성장을 돕는 회사라고 했다. 쉐어하우스의 입주민들이 다 함께 모여 소개하는 자리였기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본인의 일에 열의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하우스메이트로 만나 함께 창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응원하며 팀이 깨지고, 지금까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김애나라고 소개했다.
나와 동생이 쉐어하우스에 입주하고 한동안은 집에 사람이 없는 듯했다. 그때는 아직 도트윈을 창업하기 전이라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3층짜리 쉐어하우스가 흡사 유령의 집 같았다. 우리 방이 위치한 여름 통의 거실에 앉아있으면, 여름통 중문을 통해 집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평일 오후, 나는 주로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서 일을 하곤 했다. 그 시간대에는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평일 오후, 웬일인지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고, 중문의 유리창 너머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선 봄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나였다. 며칠 뒤 평일 오후, 그녀를 만났을 때는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의 회사는 외국계 회사라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이고, 그래서 평일 오후 시간대에 종종 집과 집 주변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 후로 내가 집에 있을 때면 종종 애나랑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녀는 대학시절을 미국에서 유학하며 보냈다고 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뇌인지공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속한 연구실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주요우울장애와 같이 정신 질환을 주로 연구하는 팀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탈북인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가 그들의 뇌와 인지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탈북인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탈북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그녀가 현재 일하고 있는 LiNK(Liberty In North Korea)에서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았던 그 당시의 나에게 그녀가 하는 일, 그녀의 생각, 비전은 흥미롭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했다.
LiNK(Liberty In North Korea)에서 그녀는 탈북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성장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탈북인들이 한국에서 정착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진정으로 탈북인들이 성장하기를 바랐다.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녀의 일이 그들에게 더 좋은 사회를 선물해주는 듯했다. 그녀는 교육분야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일이라 믿었던 듯하다. 그녀는 장애인이나 탈북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에 함께 공감하기도 했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나의 막연한 생각은 그녀가 하는 일을 통해, 느리긴 하지만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줬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면, 동생도 여름통의 같은 자리에 앉아 일을 하며 애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나중에 들을 얘기지만, 한동안 애나는 나와 동생을 구분하지 못해, 우리와 나눴던 대화들이 누구랑 나눴던 대화인지 헷갈린다고 했다. 나와 동생, 그리고 애나는 서로서로 깊은 영감을 줬다. 대화만으로 서로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우리의 대화가 유익했던 것은 아마 경청하고 공감할 줄 아는 애나의 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본인의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본인보다 한참 어린 나이임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우리를 존칭으로 부르며 존중해줬다. 그녀는 나이나 경력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었으며, 나와 동생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줬다.
나와 동생이 한창 브랜드의 런칭파티를 준비할 때, 애나는 우리를 도와주곤 했다. 그녀는 그저 순수한 마음에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브랜드 런칭파티 당일에, 그녀는 현장 스태프를 자처했다. 나와 동생 두 명이서 모든 일을 해내기에는 벅차 보였는지, 그녀는 런칭파티에 초대된 손님을 맞이하는 리셉션을 맡아줬다. 그녀가 리셉션을 맡아준 덕에 나는 런칭발표자료를 준비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고, 런칭파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할 때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애나를 통해 배웠다. 애나와 함께 하는 대화, 그리고 함께 준비하는 일들은 그저 옆에 함께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곤 했다.
브랜드를 런칭하고 난 2015년 5월, 우리는 디웰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작업실을 열었다. 주로 재택근무를 했던 애나는 종종 우리의 작업실에서 일을 하곤 했고, 퇴근을 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항상 우리의 작업실을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작업실에서 함께 일상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꿈과 비전을 이야기했다. 나와 동생이 브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옆에서 듣고 있던 애나의 의견이 도움이 됐다. 나와 동생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아, 제삼자인 애나의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의견이 조율될 때가 많았다. 애나는 그저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옆에서 우리의 일을 돕는 것을 즐겁게 여겼던 것 같다. 그녀는 우리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품을 포장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제품 개발과정에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제품 촬영을 나갈 때 옆에서 보조를 해주는 등 점점 도트윈의 일원이 되어가는 듯했다.
여느 때처럼, 그날도 애나는 우리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날은 소셜벤처를 투자한다는 투자사 대표님과의 미팅을 진행하기로 약속되어있던 중요한 날이었다. 투자사 대표님은 우리가 살고 있던 쉐어하우스 디웰을 설립한 장본인으로, 나와 동생 그리고 애나와도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다. 나와 동생은 애나에게 미팅이 있을 예정이니 자리를 비워달라는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애나도 그 자리가 그저 캐주얼한 미팅 자리라고 알았기에 있겠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투자를 요청하는 자리였지만, TV에 나올법한 발표 현장은 아니었다. 우리의 투자 발표는 작업실의 원목 테이블에 함께 둘어앉아 따뜻한 차와 함께 준비해둔 ‘도트윈 미래보고서’를 공유하며 시작되었다. 투자사 대표님에게 보여드리고자 만든 60장짜리 ‘도트윈 미래보고서’에는 도트윈이 가까운 미래에 하고자 하는 것부터 회사의 비전까지 담겨 있었다. 애나가 그 자리에 함께 하기를 바랐던 것은 어쩌면 내게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표님은 흔쾌히 우리에게 투자를 결정해주셨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투자를 결정했는지를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저 60장에 담긴 도트윈의 미래만을 보고 결정한 투자는 아니었을 듯하다. 디웰에서 직접 보고 만나며 알게 된 나와 동생의 가능성에 투자를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게 될 때가 있겠지만, 그도 애나처럼 어린 날의 우리를 편견 없이 응원해주고 지원해줬던 고마운 인연이다. 그와의 대화가 끝날 때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모든 것을 네가 직접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옆에서 너랑 재성이를 도와주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을 빨리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순간 나와 동생, 그리고 애나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던 것은 그 사람이 바로 애나라는 것을 서로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나눈 이야기이지만, 애나도 그때 본인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날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함께할 파트너 투자사를 만났고, 도트윈을 함께 이끌어갈 진정한 파트너 애나를 발견했다. 그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애나의 발견도 없었을 터이다.
애나 | 저는 원래 탈북자들을 구출, 정착 지원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NGO인 Liberty in North Korea (이하 LiNK)에서 일하다가, 디웰 하우스에서 재형, 재성이를 만나 작년 3월, 도트윈에 합류했어요. 최근 2년간 탈북민 이슈만을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일해 왔지만 이 둘과 만나면서 인권 문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거든요. 쉽지는 않았지만 고민 끝에 LiNK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현재는 도트윈에서 컨텐츠 담당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6. 05. | 루트임팩트 AR interview. 도트윈
2015년 11월 정도로 기억한다. 애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도트윈에 풀타임으로 합류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애나에게나 우리에게나 무모할 수도 있는 결정이었다. 철없는 20대 초반의 쌍둥이 형제와 20대 후반의 경력있는 애나가 만나, 우리가 모두 20대 일 때 할 수 있는 마지막 도전이라며 의미부여를 하곤 했다. 일을 함께하며 알게 된 애나는 신중하고도 똑똑한 사람이었고, 편견이 없고 평등한 사람이었다. 6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그녀는 나와 동생과 친구처럼 또 동료처럼 함께 일했다. 어쩌면 ‘나이 차이’라는 생각이 내가 누군가에게 가졌을 편견이었을 것이다. 업무에 있어서 노련했던 팀원 애나는 나이, 경력 등에 편견 없이 스물두 살 대표의 말을 진중하게 들어주고,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했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언제나 존재만으로 응원이 되는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가 나와 팀으로 함께 해준다는 그 사실만으로 내가 만들고자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비전 있는 브랜드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동생과 애나가 함께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했던 그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팀원이 세명이 되니, 우리의 팀에도 나름의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 속에 특별히 기억나는 두 가지 문화가 있다. 여느 스타트업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도트윈’으로 함께 보냈다. 하루 온종일 작업실에서 보냈고, 일과 삶은 구분이 되지 않고 우리의 모든 고민이 ‘도트윈’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도트윈에서의 일이 곧 개인의 성장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가 워크샵의 이름을 ‘성장워크샵’이라고 지은 것은 회사의 일 그 자체보다, 구성원인 우리의 성장이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워크샵의 주제는 언제나 ‘본인이 어떤 능력을 키우고 싶은지’였다. 회사를 통해 본인이 성장하고 싶은 부분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것이다. 이로써 팀원 서로는 각자가 어떤 성장욕구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고, 서로 공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각자가 성장하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 새로운 업무를 만들기도 했고, 새로운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다니고 싶어 하는 회사를 우리가 직접 만들어갔다.
우리 셋은 마치 오랜 친구들처럼 틈만 나면 다투곤 했다. 의견이 다르거나, 일하는 방식이 달라 서로가 부딪힐 때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미숙했다. 나와 동생은 문제가 발생하면 주로 입을 꾹 다물고, 대화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방치하곤 했다. 이 방식이 소모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느낀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지를 발휘하자’라는 우리만의 구호였다. 이 구호의 사용법은 이렇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 한 명 용기를 내어 ‘기지를 발휘하자’라고 하면, 서로 얼굴을 붉힌 상황이더라도 한 테이블로 모여 앉아 서로 대화를 해야만 하는 약속이었다. 그 구호는 꽤나 유용하게 쓰였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작은 약속 하나로 우리는 서로 대화로 문제를 풀고자 했고, 보다 빠르게 기분을 풀 수 있었다. 우리의 팀이 마지막으로 깨지는 순간에 기지를 발휘했다면, 과연 우리는 과연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 순간에도 마지막에 기지를 발휘하자고 했던 것은 애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애나는 도트윈의 직원이 아닌 공동창업자로 함께 했다. 실은 그녀가 도트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나열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도트윈에게 줬던 의미는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였다. 회사를 운영하며, 어린 나의 마음이 애나와 동생을 경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표의 역할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도트윈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어리석은 대표였다. 애나는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이었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도트윈은 하나의 회사이기에, 도트윈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지도 않았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 당시에 대표의 자리를 애나에게 맡기는 결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공동으로 창업했다면, 회사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 무엇 일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약 1년의 시간을 함께하고, 애나와 동생은 도트윈의 곁을 떠났다. 도트윈과의 작별을 고했을 때, 나와 동생, 그리고 애나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고, 우리가 다시금 함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지를 발휘해보자고 했던 것은 애나였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던 대표였다. 애나는 도트윈을 떠나고서 꽤나 방황했던 것으로 안다. 몇 개월의 방황 끝에 애나는 그녀만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미네르바 스쿨에서 한국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인권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함께 창업을 하고, 그녀의 최대 관심사였던 교육을 고민할 수 있는 회사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역시 애나답다’라고 생각했다.
나와 동생, 애나 셋의 우정은 예전만큼이나 돈독하며,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나는 도트윈이 김애나라는 유능한 사람을 공동창업자로 함께 한 것에, 또 나와 동생과 애나가 서로를 믿고 다시금 관계를 회복한 것에 자부를 느낀다. 나는 그들과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하고 팀이 깨진 것은 나의 불찰이라는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가 준 상처를 치유하고, 이해하고, 그 시기를 극복하여 다시금 우리의 우정을 확인한 것이 우리가 진정 기지를 발휘했던 순간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팀이 깨졌다고 해서, 그들과의 인연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오히려 팀이 깨질 때가 한층 더 성숙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우리는 이제 작은 회사가 아닌 넓은 세상에서 서로를 지켜줄 팀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