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는 자의 고백
2022년 12월 7일. 약 1년간의 휴식을 마치고 드디어 복직을 했다. 지금이야 내가 언제 자리를 비웠었나 싶을 만큼 잘 적응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작년 이맘때를 돌아보면 난 지금과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휴직을 결정하기 전 수도 없이 반복하던 걱정과 고민이 무색할 만큼 정작 휴직이 시작되니 너무나 기뻐서 마주한 현실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아, 이제 드디어 마음껏 혼자 있을 수 있어.
이제는 마음껏 쉴 수 있어.
이제는 마음껏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어.
마음껏 슬플 수 있어.
마음껏 화낼 수 있어.
마음껏 울 수 있어
마음껏, 마음껏……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기쁨의 외침 저변에는 ‘눈치 보지 않고’라는 전제가 있다. 세상에는 눈치를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의식적으로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눈치를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해 보면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라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눈치라는 것이 겸손과 배려를 미덕으로 삼는 동양권 문화의 특성 중 하나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알아“내는” 것이라는 표현이 걸린다. 나는 타인의 감정신호에 감수성이 높은 성향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눈치는 타인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읽어“내는” 자발적인 활동보다는 외부에서 오는 신호가 걸러지지 않아서 들어오는 족족 정보를 처리해야만 하는 비자발적 활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런 특성이 내가 HSP(Highly Sensitive Person)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다.
“눈치 보지 말고 네 스타일대로 해. 뭐 하러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
어설프게 눈치 보이는 것 때문에 힘들다고 고민을 토로했다가는 이런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다. 심지어 눈치를 보지 않는 척까지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중삼중으로 에너지를 들여야 하기 때문에 더욱 고단해진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자극을 차단한 환경을 조성해야만 "정말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은 뇌 속에서도 변연계의 영역이다. 이는 감정이 이성보다 더 본능에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이성은 감정을 야생의 동물을 길들이듯 살살 달래는 정도로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나는 감정적인 내 모습을 스스로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려고 달려들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휴직을 하고서 한껏 과민해졌던 내 신경계(?)에게 휴식을 주고 마음껏 화내고 마음껏 슬퍼하며 마음에 쌓인 찌꺼기들을 비워주었더니 곧이어 나는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즐거워하고, 마음껏 행복해하며 내 마음을 다시 채울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보살피며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나는 몸이 마음을 담는 집이니 건강한 몸을 가지면 마음도 저절로 건강해지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마음도 그릇에 담겨야 했다. 그래서 그 그릇을 평소에 잘 빚어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마음껏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함이다. 마음껏 OO하는 기쁨을 잃을 순 없기 때문이다.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것. 마음껏 OO한다는 것.
그것이 행동이든 감정이든 마음껏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공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