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작
초등학생이 낙서한듯한 이 그림 뭐냐고?
내가 그린 거야.
알아 원래 내 그림체랑 많이 다르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때 내가 날 너무 몰아붙여서 숙제하듯 그리면 이렇게 졸라맨 같은 풍이 나와.
100일의 이야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땐 매일 그림을 그려 올리려 했어.
근데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어.
아침부터 낮엔 일을 가고, 다녀와서 종이학 종이를 만들고, 종이학을 접고, 패널에 종이 붙이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글 쓰고.
매일 하기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하더라.
스스로와 한 약속이라는 생각에 나 자신을 엄청 몰아붙였어.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을 꿨어.
언덕이 너무 가팔라서 거의 네발로 기어올라갔어 아무도 없었지만 되게 기시감이 드는 언덕이었어.
언덕 꼭대기엔 집이 있었어.
집에는 누군가를 낚기 위한 치즈트랩이 있었지.
나는 이미 눈치챘지만 다른 누군가가 다칠까 봐 트랩을 조심스럽게 해체해 놓았지. ㅎㅎ
그 집에 차려져 있는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던 것 같아.
그러다가 반대쪽 문으로 나오니까 이번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어.
꽃도 많고 날씨도 좋았어. 즐거운 마음으로 나들이하듯 걸어갔지.
그러다 꿈에서 깼어.
잔잔하지만 강렬했던 꿈이었기에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어.
내 느낌엔 가팔랐던 오르막길은 지옥이었고,
완만했던 내리막길은 천국이었거든.
그림 속 집 안에 있는 코끼리가 있는 이유는..
연속으로 꿈을 꾸었는데 내가 패널에 이합장지를 배접 하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베란다에서 같은 작업을 하는 걸 보았어.
할아버지는 하얀 모시옷을 입고 있었고 그 뒤엔 코끼리가 있었지.
그것도 남기고 싶었달까?
근데 내 그림을 봐.
펜을 너무 꾹꾹 눌러 담았고,
내가 느낀 것을 다 나타내지 못했어.
결국 이게 뭔 그림이야? 싶은 초등학생 그림이 나왔지.
갑자기 분이 차올랐어.
안 그래도 매일매일을 시간에 쫓기고 체력은 떨어져 가는데 그림조차 내 마음대로 안 나오니 말이야.
그래서 악을 쓰며 펜을 마구마구 문댔어.
그게 왼쪽 기어 올라가는 길에 있는 흔적들이야.
분에 못 이겨서 눈물도 뚝뚝 흘렸어.
펜은 다 망가졌고, 종이도 덕지덕지 뜯어졌어.
이 일 이후로 조정을 좀 했지.
그게 바로 이전에 올렸던 "조정"이란 글이야.
한동안 패턴을 찾는 시기를 보내다가 이젠 주 3회 정도 꾸준히 글을 올릴 수 있는 루틴을 찾았어.
참 다행이지.
근데 이 그림을 올릴까 말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
초등학생 같은 내 실패작도 작품으로 볼 것인가?
경험으로 삼아 사진만 남기고 위에 다른 종이로 덮어 다시 그릴 것인가?
어제까지도 고민했어.
사람들은 보통 예술가들의 인기 많은 작품 두어 개만 기억하고 그것들만 회자되지.
그들의 스케치나 구도가 엉망인 실패작은 집에 걸어두지 않아. 기억되지 않아.
근데 그 습작이나 실패작 또한 그 예술가가 만든 거고 그것들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들어낸 거지.
그래서 난 이 그림을 없애고 싶지 않았어.
그 결과 오늘 이 그림을 올린 거야.
물론 앞으로는 이런 그림이 나올 확률이 적어졌지만 누가 알겠어.
또 그림이 안 나오는 날이 올지.
이젠 내 손을 타고 나온 모든 창작물들은 아껴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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