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기에 약사는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쾌적한 실내에서 일하고 의사들처럼 수술을 하거나 피를 볼 일도 없으며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확인하고 약을 조제하여 복약 설명을 하는 일, 증상에 맞는 일반약을 진열장에서 찾아 건네주는 일, 또는 간단한 상담을 통해 건강기능식품 같은 영양제를 판매하는 일로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근무를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부분들도 많다.
우선 약국의 하루는 이러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송되는 약상자를 번쩍번쩍 들어서 옮긴다.(그래서 오래 일하다 보면 저절로 팔 힘이 세진다..) 그리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 상자를 뜯어서 약을 제자리에 정리한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는 반알 처방이 자주 나오는 약을 미리 잘라놓고 ptp 포장된 약들도 그날 쓸 만큼 미리 까놓는다. 조제할 때 불편하지 않도록 비어 가는 약통은 채워놓고 재고가 부족한 건 없는지 체크한다. 주기적으로 약장을 살펴보고 유통기한 다 되어가는 약이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약들은 따로 챙겨서 반품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향정신성 의약품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보고 전산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장기처방을 받아오는 분들이 오실 날짜를 체크하여 약이 부족하지 않도록 미리 주문해놓는다 등...(휴... 글을 쓰는데 숨이 차다..ㅎㅎ)
이렇듯 소소하게 신경 쓰고 챙겨야 될 일들이 의외로 많고 단순 노동에 해당하는 일들도 많다. 어떤 면에서는 집안일과 비슷하는 생각도 든다. 온종일 바쁘게 일을 해도 당장 크게 티는 안 나지만, 안 해놓으면 막상 다음에 일할 때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이 쌓이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한 가지 일을 다 해놓고 돌아서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약국일을 하다 보면 새삼스레 엄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내가 맛있는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고 깔끔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엄마의 노고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편리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국 근무를 시작한 후 가장 놀랐던 점은 약국에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병원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데 약국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요즘은 잠깐 문을 닫고 점심을 먹고 오는 약국도 있다고 하던데, 내가 근무했던 약국은 다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나마 직원이 많은 약국은 교대로 나가서 밥을 먹고 오기도 하지만 규모가 작은 약국은 조제실 안쪽 공간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그래서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일어나서 일을 해야 된다. 온전한 휴게시간으로서의 점심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거나 쉴 수가 없다.
물론 운 좋게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님이 많이 오는 날에는 밥을 우물거리며 몇 번이나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밥은 식고, 입맛은 떨어지고, 그나마 먹은 것도 소화가 안 된다. 밥을 먹었는데 안 먹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경험을 통해 배달 음식 중 면 종류는 시키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손님이 몇 명 왔다 가면 면은 불어서 다 못 먹고 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님이 오기 전에 빨리 먹기 위해 점점 밥 먹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러다 보니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한 그릇도 편히 앉아서 못 먹으면 가끔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약국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점심시간만이라도 편안하게 밥을 먹고 잠시 쉴 수 있다면 삶의 질이 훨씬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약국을 한다면 점심때 한 시간, 아니 30분만이라도 문을 닫고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하고 싶다. 시간이 된다면 식사 후에 햇빛을 쬐며 잠깐 산책도 하면 좋겠다. 하루 종일 약국에서 근무하다 보면 햇빛을 전혀 못 보는 날이 대부분이다. 사람도 광합성을 좀 해줘야 건강에도 좋은데 말이다.
또 한 가지, 화장실을 제 때 못 간다. 물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순간이라면 손님이 있어도 화장실로 뛰어가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급하지 않으면 그냥 참는다. 손님이 있는데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손님이 다 가고 나면 그제야 화장실을 다녀온다. 환자들에게는 '참으면 안 됩니다. 변비나 방광염이 생길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을 갈 수가 없다. 항상 약국을 지키고 있는 약사를 보면서 약사니까 건강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아파도 약국을 비울 수가 없으니 출근해서 약을 먹고 일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약국에서 일을 시작하고 감기, 소화불량, 두통 같은 간단한 증상으로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
그나마 근무약사는 심각하게 아플 경우 약국장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쉴 수도 있지만, 개국 약사 중 혼자 일하는 1인 약국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수술을 해야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약국을 맡길 사람을 구하지 못해 진통제로 버티며 수술을 미루는 경우도 보았다.
사실 이런 육체적인 부분보다 더 힘든 것은 무례한 사람, 소위 진상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약사는 전문직인 동시에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도 만난다.
멋모르던 초보 약사 시절에는 상처도 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이제 웬만한 일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멘탈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경우 진상 손님도 손님이기 때문에 같이 무례하게 굴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꼭 필요한 서비스만 제공할 뿐이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약사의 삶에 대해 적어본 것은 가끔 "그것만큼 편한 직업이 어디 있어?"라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오해하는 분들에게 한 번쯤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면을 알지 못한 채 소위 '사'자가 들어가는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약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약사라는 직업 역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V나 영화 속에 간혹 등장하는 약사의 모습은 극히 단편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이야기들 모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실제로 일을 해보기 전에는 몰랐던 부분이다.
하지만 여러 힘든 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지식과 소통 능력으로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인 부분을 감수하고서라도, 약사가 되고 싶은 자기만의 이유를 가진 약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