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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Dec 30. 2021

엄마 말 듣기 참 잘했다!

내가 약사가 된 이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어릴 때 나의 꿈은 자주 바뀌었다. 초등학교 시절 1년에 한 번씩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칸에는 해마다 다른 꿈들이 채워졌다.


멋모르던 저학년 때는 엄마가 적어주는 대로 선생님이었다가,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는 피아니스트였다가, 갑자기 스튜어디스를 적어낸 적도 있었다.(그때는 그냥 예쁘게 꾸며서 비행기를 타고 여행 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 그러다 글짓기 대회에서 몇 번인가 상을 받고 나서는 소설가, 방송작가 같은 꿈을 꾸었다. 주관이라는 것이 생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어쨌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내가 원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껴 소설 쓰기에 푹 빠진 적도 있었다. 학교 생활에서 소재거리를 찾아 사실을 약간 변형하여 허구로 만든 소설을 친구들과 돌려 보기도 했다. 마치 드라마를 편성하듯 각 회차별로 대략의 줄거리를 잡아놓고, 거기에 살을 붙여 한 글자씩 노트에 적을 때 색다른 설렘을 느끼곤 했다. 다음 편이 궁금하다며 빨리 써오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서 1학년 말에 문과, 이과를 나눌 때 심각한 고민을 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당연히 문과를 가는 것이 맞았다. 국어국문학과로 가서 작가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을 만큼 잘 쓸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제법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문과에 가서 법대를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셨다. 나는 우선 한자가 너무 싫었고 딱딱한 법 공부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해보지 않았지만 그냥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엄마는 '이과에 가야 먹고 산다'고 무조건 이과를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문과만 생각해왔기에 이과에 가면 뭘 할지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약대라는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해주셨다.


약사라는 직업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피를 보고 수술을 해야 하는 의사보다는 뭔가 심적으로도 편하면서 여자 직업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되거나 신약개발 같은 연구직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이과를 선택했고 엄마의 바람대로 약대에 진학했다. 약대 공부는 물론 쉽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분야도 있었다. 하지만 교수가 되거나 신약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오랜 기간 해야 되기에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학교에서 벗어나 빨리 돈도 벌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과 타협한 나는 대부분의 약대생이 그러하듯 졸업 후 근무약사로 약국에 취업을 했다.

 
약국 근무를 시작하고 처음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 원래 과거의 나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남들 앞에서 발표라도 하면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잘 못 거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목소리도 작은 편이었다.


그런 내가 매일같이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말을 해야 하니 근무시간 내내 고역이었다. 온종일 긴장 상태로 있다가 퇴근할 때면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약사는 내 길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1년 정도 지나자 그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나름 프로 직장인이 된 지금은 시끄러운 와중에 큰 소리로 환자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단골손님에게는 먼저 안부도 묻고, 복약 설명 중 가끔 농담도 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다양한 약 공부를 하는 것도 재밌고 내가 가진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뿌듯하다. 자신의 직업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역시 엄마 말 듣기를 잘했다!!




한국에서 인세 수입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기약 없이 좌절이 이어지는 일상은 사람의 마음에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 건강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없다면 더 그렇다. 반면 직장 생활을 하며 내실 있게 쌓은 사회 경험은 좋은 작가가 되는데 장기적으로 유익하면 유익하지 해롭지 않다.

장강명 <책 한 번 써봅시다>


이 글을 읽으며 한 때 꿈꾸었던 글 쓰는 일은 직업이 아닌 '좋아하는 일'의 영역에 남겨두기를 잘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꿈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지 반드시 잘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밥벌이가 되면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기에, 꿈이 생계유지의 수단이 되는 순간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꿈이 반드시 직업과 같을 필요는 없다. 물론 좋아하는 일로 돈도 잘 벌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 버는 돈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서 오는 충족감이 직업으로서의 일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꿈과 직업은 톱니바퀴처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굴러갈 수도 있다.


나 또한 약국 근무를 하며 얻은 사회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글을 쓰는 소재거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는 말에도 적극 공감한다.


앞으로도 약사로 열심히 일하며 좋은 글도 많이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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