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일, 새해 첫날 또 한 번의 소개팅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이다. 어머니 친구 분의 아는 분이 소개해주셨으니 말이다.
12시쯤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사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식사는 조금 불편해서 좋아하지 않는다. 가볍게 커피 한 잔 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상대가 먼저 밥을 먹자고 하기에 그냥 그러자고 했다.
초밥을 먹기로 했다. 식당에 도착해 만난 상대의 첫인상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는 부드러운 이미지다. 무표정의 사진 인상은 화난 듯 딱딱해 보였는데 웃으니 또 달라 보인다. 역시 사람은 만나봐야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간단히 인사를 하고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판을 보았다.
"일단 모듬초밥 2세트 시키고 또 뭐 드시겠어요? 우동이나 덮밥도 있고 아님 후토마끼도 있네요."
"네? 아.. 저는 초밥만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님 새우튀김 하나 먹을까요?"
모듬초밥 2개만 시키면 될 것 같은데 자꾸 뭔가를 더 권한다. 그래서 새우튀김을 하나 먹자고 했더니 모듬초밥에 새우튀김에 후토마끼까지 주문한다. 양이 많을 듯했지만 건장한 성인 남자 입장에서는 모듬초밥 하나로 양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1월 1일인데 생각보다 식당에 사람이 많았다. 주문이 밀려 음식이 조금 늦을 수 있다고 직원이 미리 양해를 구했다. 어색하게 마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문하지 않은 고로케와 일본식 닭국수가 나왔다.
"식사가 늦어져서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기다리시는 동안 드세요."
애피타이저 느낌으로 서비스 음식을 먹고 나니 벌써 배가 조금 불렀다.
곧이어 초밥이 나오고 후토마끼도 나왔다. 그런데 후토마끼 양이 엄청나다. 게다가 절대 한입에 먹을 수 없는 사이즈였다. 거기에 새우튀김까지.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거하게 차린 한상을 먹어보기는 또 처음이다. 먹다 보니 미소장국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요청하려고 하니 이 남자 또 묻는다.
"국물이 필요하시면 우동을 하나 시킬까요?"
(아니 지금도 많은데 또 시키자고?)
먹는 걸로 마음 표현을 하는 사람인가 생각해본다. 다행히 직원이 빠뜨려서 죄송하다고 미소장국을 가져다주었다.
불편하고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결국 후토마끼는 다 먹지 못하고 포장해서 가져가기로 했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를 마시며 또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늘 그렇듯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보통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음식 이야기(좋아하는 음식, 못 먹는 음식), 취미생활, 직장생활, 여행 이야기, 문화생활(음악, 책, 드라마, 영화) 같은 것들이다. 요즘은 코로나 관련 대화도 종종 한다. 예를 들면 "코로나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던지 "코로나 백신은 맞으셨어요? 어떤 거 맞았어요? 몸살은 안 하셨어요?"라던지.
그런데 이 사람, 도무지 공통의 관심사를 찾기가 힘들다. 개인적으로 문화생활에서 나눌 이야기가 많을 때 가장 대화가 풍성해진다는 느낌인데, 책도 안 읽고 음악도 거의 안 듣고 영화도 드라마도 안 본다고 한다.
"음.. 그럼 퇴근하고 나면 주로 뭐하세요?" (모를 때는 물어야 한다..)
"요즘 회사일이 바빠서 야근을 자주 하거든요. 원래는 이렇게 바쁘지는 않았는데 최근 1년 동안은 거의 9시~10시에 퇴근하고 있어요. 퇴근하면 시간이 너무 늦으니까 그냥 씻고 자는 거죠 뭐.. 그리고 일어나면 또 출근하고요. 하하."
일상이 직장과 일밖에 없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척이나 한정적이다. 그 일이라는 것이 나와 비슷하거나 내가 잘 아는 분야라면 그나마 또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욱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에게 취미생활을 묻기에 책 읽기라고 했더니 뜬금없이 예술 쪽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한다.(내가..? 어딜 봐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약간 당황스러웠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것을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길래 어릴 때 피아노를 좀 배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본인도 이모가 피아노 선생님이라서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고 말한다. (휴.. 드디어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드디어 찾은 유일한 공통점!!!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커피를 다 마시자 또 권한다.
"커피 한잔 더하시겠어요? 아님 음료수라도?"
(이 남자, 왜 나에게 계속 뭘 먹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배가 불러서 괜찮다고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는데 1시간, 카페에서 1시간, 총 2시간 정도를 보냈다. 아마 친해지기 조금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웃으며 헤어졌다.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면서 소개팅과 선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정확히는 '선'이 좀 더 많았다. 나이가 어릴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가벼운 소개팅이 많았는데,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도 점점 소개팅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결혼을 하기도 했거니와, 이제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다 보니 중간에서 누군가를 쉽게 소개해주기에는 부담이 따르는듯하다. 그래서 '미혼남녀 결혼시키기'에 진심인 어른들이 건너 건너 소개해주는 누군가와 만나는 '선'을 많이 본다.
과거 한때 주변 친구들이 다들 결혼을 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 역시 뭐라도 해야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주말마다 정말 열심히 누군가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주말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고, 다소 불편하게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반복되는 소개팅과 선을 경험하다 보니 사람만 바뀔 뿐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 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는 한정적이다 보니 지난주에 다른 사람과 나눈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누구의 마음에도 와닿지 않는, 허공을 떠다니는 이야기를 1시간, 2시간씩 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재밌지 않아도 웃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그 모든 과정에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되는 걸까'
현타가 왔다. 나중에는 이 이야기를 이 사람과 한 건지 지난주의 그 사람과 한 건지 헷갈리는 상황까지 생겼다.
그저 불안감에 떠밀려 만났던 그때의 사람들은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았다. 사실 30년을 넘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던 남녀가 누군가의 소개로 만나서, 몇 번의 만남으로 호감을 가지고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확률적으로 희박한 일이다. 나 역시 소개팅으로 연애를 시작한 적은 딱 1번이다. 나머지 연애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 관계로부터 발전한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이 사람이 내 인연은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사소한 공통점이라도 찾기를 바라며 만남을 이어가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감에 지친 나는 더 이상 이런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고 휴장을 선언했다. 엄마와 주변 지인들에게도 당분간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누굴 새롭게 탐색하거나 소개받아 만나서, 서로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고, 점차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가 되어가고, 나아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그 모든 연애의 절차가 너무 번거롭고 귀찮은 데다 결국은 허무하기까지 해서 구태여 새로이 연애를 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장류진 <달까지 가자>
반복되는 소개팅과 선으로 지친 내 마음이 딱 저런 상태였다. 굳이, 이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을 애써서 해야 될 필요가 있을까?
그 후로 당분간 주말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우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결혼이 인생에서 꼭 달성해야만 하는 최상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집착을 조금 내려놓자 한결 편안해졌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조급함과 불안감을 내려놓으니 그동안 '연애와 결혼'이라는 가림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였다.
그래서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소개로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지만, 가끔 그런 자리가 있을 때도 '이 사람이 연애를 할만한 사람인지, 결혼까지 갈 수 있겠는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를 바라보려고 한다. 나와 안 맞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경험 가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남녀라는 틀에서 벗어나 각자의 귀한 시간을 내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 혹시 이성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오자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 상대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배울 점이 있는지 찾게 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첫 만남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고작 두어 시간의 대화로 상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척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첫인상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첫인상은 말 그대로 '첫'인상이지 않은가. 이것이 끝까지 그대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그런 단어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친해지고 나면 첫인상과는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도도해 보인다, 차가워 보인다, 대하기 조금 어렵다'라고 말하지만 친해진 친구들이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떻게 약대를 갔는지 모르겠다, 공부라도 잘해서 천만다행이다, 엉뚱하다' 같은 말들.
아마도 나의 첫인상은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많이 건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소개팅이나 선에 나오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므로 소개팅이나 선으로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를 '연애나 결혼의 대상으로 판단' 하려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대신 상대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하며 그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친해져 진짜 모습을 알아가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