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중에 봄을 가장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꽃샘추위 때문에 날씨가 변덕스러운 봄의 시작보다는 본격적으로 따뜻해지는 늦봄, 여름이 오기 전까지 아주 잠깐 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따스한 햇빛을 쬐며 산책하기도 좋고 이따금 벤치에 앉아 멍 때리기도 좋은 계절. 어딜 가도 예쁜 꽃이 피고, 꽃놀이 갈 생각에 마음이 솜사탕처럼 몽글몽글 설레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덕에 조금 천천히 걸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들.
그래서 나는 늦봄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인 <봄날은 간다>를 보면 사랑의 사계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이영애와 앳된 모습의 유지태를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같은 명대사로 유명한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의 사계를 잘 그려낸 영화로 기억한다.
상대를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간질간질한 설렘이 가득한 봄 뒤에는, 여름처럼 격정적인 사랑의 시간이 오고, 그 사랑이 식어갈 때쯤 함께 있어도 외로운 서늘한 가을, 그러다 보면 결국 겨울이 온다. 연애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사랑의 사계이다.
아마 이 영화를 멋모르던 20대 때 봤다면 그렇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연애와 헤어짐 후에 30대가 되어 우연히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에게 지난 연애의 장면 장면과 그때의 감정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술을 마신 유지태가 이영애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이 있다. 이때가 뜨거운 여름의 사랑이다. 여름의 사랑은 때로는,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여름의 사랑
하지만 가슴이 터질듯한 격정적인 여름의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기에 어느 순간 결국 가을, 겨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마주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던 계절을 지나, 어느새 영화 속 두 사람에게도 함께 있지만 더 이상 대화가 없고 표정에서도 냉기가 느껴지는 가을이 찾아왔다.
어느새 찾아온 가을의 사랑
표정에서 느껴지는 냉기...
사랑의 사계를 맛으로 표현한다면, 달달하게 시작해 입안 가득 뜨거워졌다가 눈물 날만큼 매워지고 마지막엔 씁쓸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외치지만 사랑은 변한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데 사랑이라고 어떻게 안 변할까.
필연적으로 가을, 겨울로 넘어가는 여름의 사랑보다는 늦봄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뜨거워지지 않아도 되니까 늦봄에서 오래 머무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결혼도 그런 사람과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적당히 설레고 편안하고 따스하게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늦봄 같은 사람. 나의 평정심을 갉아먹지 않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롤러코스터같이 감정 기복이 심한 관계는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서로 잘 맞고 좋을 때는 하염없이 좋지만, 싸울 때는 밑바닥까지 내려가 끝을 볼 것처럼 싸웠던 사람이 있었다. 여름과 겨울을 오가는 듯한 연애 끝에 남은 것은 엄청난 감정 소모와 스스로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배우자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롤러코스터도 한두 번 탈 때야 좋지, 평생 타면 심장병 걸린다...)
늦봄 같은 사랑의감정은 상대가 가진 조건이 만들어줄 수는 없는 영역이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감정 없이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계절 속에 갇혀버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