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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an 11. 2022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요

소개팅 애프터 이야기

1월 1일에 소개팅했던 상대와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다. 한 번의 만남으로 누군가를 다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아니다'라고 느끼지 않는 한 두세 번은 만나보는 편이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파는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인생 파스타'라고 말할 정도로 맛있는 로제 파스타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서 친구들에게도 종종 추천을 해주곤 한다. 내가 사는 지역까지 1시간이나 걸려서 왔으니, 이왕이면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로제 파스타, 상대는 까르보나라. 각자 몫의 파스타를 하나씩 골랐는데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또 묻는다.

"사이드는 뭘로 하시겠어요?"

(응? 파스타 하나씩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사이드를 또 먹어야 되는 거야?)

"아.. 저는 파스타 하나만 먹어도 될 것 같은데, 혹시 양이 부족할 것 같으면 먹고 싶은 걸로 하나 더 시키세요."

"감바스 어때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이번에도 사람은 둘인데 메뉴는 세 개다. 둘이서 메뉴 세 개를 주문해서 먹는 일이 일상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곧이어 음식이 차례대로 나왔다. 오랜만에 먹는 로제 파스타라 즐겁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을수록 맛이 다르다. 친한 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아직은 다소 불편한 사람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먹는 파스타는, 맛도 잘 안 느껴졌지만 잘 내려가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겉도는 듯한 대화가 만들어내는 답답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나의 소화 기관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소화가 안되는 답답함...


그 와중에 감바스도 먹으라고 권해서 또 먹었다. 의식적으로 꼭꼭 씹었는데도 미처 내려가지 못한 파스타 면과 새우가 속에서 뒤엉키는 기분이 들며 소화가 안되었다.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음식의 맛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음식도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먹느냐에 따라 다른 맛이 나기도 한다는 것 또한 느꼈다.


결국 나의 인생 파스타인 그 로제 파스타를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가기로 했다. 만나기 전날 점심 먹고 잠깐 산책 어떠냐고 묻길래, 나 역시 걷는 걸 좋아해서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굽 높은 구두 대신 산책하기 편한 슬립온을 신고 갔었다. 대나무 숲이 있는 좋은 산책로를 검색해봤다고 해서 나름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좀 걸으면 소화도 될 테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산책은 험난했다. 산책이라고 말해서 나는 그저 평길을 조금 걷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초입부터 다소 가파른 경사가 있는 산길이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등산복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가끔 스틱까지 갖고 오신 분도 있었다. 우리 같은 복장으로 올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한 산책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숨찬 목소리로)

"네.. 뭐...(헉헉)"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둘 다 점점 말이 없어지고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다행히 그다음부터는 어느 정도 완만한 길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산길이었다.


말없이 올라가며 정인의 <오르막길>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 지 몰라....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 일지 몰라."

혼자 머릿속에 노래 가사를 떠올리 힘든 와중에 웃음이 났다.


대나무 숲을 보고 좀 더 올라가다가, 본인도 계속 올라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돌아서 내려가자고 했다. (다행이었다...!!) 1시간 동안의 예상치 못한 산행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 사이 소화 기관으로 가야 될 혈액들이 운동 기관으로 가버려서 소화는 더 안 되는 기분이었다.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내일은 뭐하냐고 묻는다.

"뭐.. 특별한 일은 없어요. 읽던 책 마저 읽고 영화나 한편 보려고요."

"그럼 내일 점심 어떠세요?"

(내일 또 오겠다고...?!)

"아... 내일은 좀 쉬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좀 무리를 했더니.. 하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말에는 시간 어떠세요?"

"아... 다음 주는 가족 여행을 가려고 계획 중이라서 힘들 것 같아요."

"네 그럼 연락 또 하겠습니다."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또 연락을 하겠다고 말한다.


집 근처에 도착해서 내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초콜릿을 하나 건네준다. 미국 출장 갔을 때 사온 민트 초코라고,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했다. 커피랑 먹으면 맛있다는 말도 덧붙인다.(아.. 사람은 참 착한데... 근데 그냥 착하기만 해...)

 

초콜릿은 맛있었다...


물론 사람이 착한 것은 좋다. 나쁜 남자보다는 착한 남자가 나으니까.


하지만 착하기만 해서는 좀 곤란하다. 말이 잘 통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그래야 함께 밥을 먹어도 편안하고 또 보고 싶은 마음도 들기 때문이다. 대화가 겉돌고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면 나도 모르게 만남을 피하게 된다.




불편한 식사에 이어 등산까지 하고 온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체했다. 소화제를 먹고도 안되어서 매실차를 타마시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소화가 안되어 눕지도 못하고 침대에 기대어 있는데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이 신발에 흙이랑 나뭇잎은 다 뭐야? 어딜 다녀왔길래 신발이 이래?"

현관에 벗어놓은 내 신발을 보고 엄마가 야단이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엄마.. 내 의지가 아니었어...)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다행히 속은 괜찮아졌다. 그가 말한 것처럼 민트 초코는 커피랑 먹으니, 적당히 달콤하면서 적당히 시원한 민트맛이 입안에 남아 맛있었다. 초콜릿을 녹여먹으며 생각했다.


'초콜릿은 맛있지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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