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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Feb 04. 2022

소개팅 오답노트

나이가 들 사람을 많이 만나볼수록, 취향이 뚜렷해지고 나만의 기준이 생김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경험한 적지 않은 소개팅과 선이 시간낭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여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못 견뎌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지,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수능을 준비할 때 틀린 문제를 또 틀리기 싫어서 열심히 오답노트를 썼다. 처음 보는 모르는 문제를 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틀린 후에 풀이 방법을 기록하고 숙지하여 다음번에는 안 틀리면 된다.


오답노트를 작성함으로써 '틀렸다'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경험 가치'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소개팅이라는 경험을 통해 얻은 나만의 기준을 기록해두면 미래의 내가 한결 수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개팅 오답노트를 만들어보았다.





#나의 소개팅 오답노트


1. 티키타카가 안 되는 사람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기 위해서는 대화가 즐거워야 한다. 취향이나 코드가 비슷하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고 자기 이야기도 적절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즐거운 대화가 가능하다.


탁구공을 주고받듯 크게 애쓰지 않아도 오고 가는 대화가 편안하게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화하는 시간이 고역인 경우도 있다. 내 경험상 티키타카가 안 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부류다. 너무 자기 말만 하는 사람과 반대로 너무 말이 없는 사람, 두 부류 모두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소개팅하는 두 시간 내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보통은 소개팅 자리에 나오면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묻고 공통점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사람은 묻지도 않은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학창 시절 이야기까지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끼어들 틈도 없이 말을 하는 탓에,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리액션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는 머리가 아프고 하품이 나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끊임없는 말....

 

반대로 너무 숫기가 없어서 묻는 말에 대답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낯을 가리는 편이라 일대일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눈도 못 마주치고 앉아있는 상대를 보니 나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겨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정말 질문에 대한 답만 하고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OO 씨는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집 앞에 산책로가 있거든요. 거기 나가서 걷거나.. 아니면 집에서 티브이 보고 그래요."

(침묵)

보통은 대답 후에 역으로 나에게 주말에 뭐하는지 질문을 하거나, 다른 주제에 대해 말을 이어나가는데 정말 이렇게 답만 하고 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내가 스스로 묻지 않은 말에 답을 했다.

"그러시구나.. 저는 책 읽는 거 좋아해서 서점 나들이 가거나 가까운데 여행 다니는 것도 좋아해요."

"네..."

(침묵)


침묵의 불편함...



침묵을 못 이긴 나는 또 질문거리를 생각해내서 어떻게든 불편한 공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이런 패턴의 대화를 한 시간 정도 반복하고 있자니 원맨쇼 하는 기분이랄까. 너무 힘들었다. 나중에는 지치기도 하고 약간 짜증도 나서 한마디 던졌다.


"근데 OO 씨는 저한테 궁금한 게 하나도 없으신가 봐요. 저 혼자만 질문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살짝 마음 상하려고 하는데.."

"아.. 그건 아니구요...(급 당황한 눈빛) 제가 처음 보는 사람이랑 말을 잘 못해서... 다음번에는 제가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올게요...!!"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아니,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와서 인터뷰를 하겠다는 건가.. 대체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사람이 나쁘진 않았지만(정말 착하고 순박해 보였다.) 나는 대화가 잘 통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이 좋기에,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 자기만의 취미생활이 없는 사람


나는 직업으로 하는 일 외에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취미생활이 하나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하나쯤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있다면 인생이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로워진다. 또한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사귀는 사이가 되어도 항상 함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각자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서라도 취미생활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학창 시절에는 공부만 하다가 지금은 일만 하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의외로 특별한 취미생활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모범생의 길을 살아온 그들이기에 성실함과 끈기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삶의 즐거움이 없어 보인다.


"평일엔 퇴근하고 나면 뭐하세요?"

"저녁 먹고.. 피곤하니까 유튜브나 티브이 잠깐 보다가 그냥 자는 거죠 뭐."

"그럼 주말에는 뭐해요?"

"주말에는 아는 형 약국에 가서 일 도와주고 그래요. 주말에도 문을 여는 곳이라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리고 제가 허리가 좀 안 좋아서 도수 치료받으러 갈 때도 있구요."

"아... 일 말고 특별히 취미 생활 같은 건 없으세요?"

"뭐 그냥 티브이 보고 가끔 영화 보고 그렇죠."

"주말에도 일하러 가시고... 일하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ㅎㅎ"

"특별히 할 것도 없고 남는 시간에 돈 벌려고 하는 거죠 뭐."


인생이 일밖에 없는 사람은 무채색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취미도 취향도 없는 사람에게는 재미도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가 없다.





3. 너무 많이 재는 사람


'연상남은 재고 있을 때 연하남은 액셀을 밟는다'



주로 연하와 사귀고 결국 결혼도 연하남과 했다는 한 여성이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찰떡같은 표현이구나'하고 감탄했다. 사실 나도 그렇고 연하는 싫다고 손사래 치던 주변의 친구들도, 어쩐 일인지 30대가 되면서 연하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30대가 되어 소개팅이나 선으로 만났던 연상남들 중에는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이 많았다. 잘되면 사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성 간의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관계 설정을 차일피일 미루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중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재는 사람에게는 있던 호감도 사라짐을 경험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연하남들은 연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고 직진해오는 사람이 많았고, 그럴 때 호감이 더 커짐을 느꼈다. 연상 연하를 떠나 너무 재는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4. 가치관이 다른 사람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가치관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다름과 인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를 경우 의도치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치관이 비슷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삶에 있어서 '성장'과 '경험'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계발에 진심인 편이고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서로의 일상에 대한 대화를 하던 중, 내가 새벽 기상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 상대가 웃으며 한말이 있었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 안 힘들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피곤하게 사는 삶'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새로운 경험에 소비하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는 편이다. 예전에 취미로 캘리그래피와 보태니컬 아트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자격증을 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데 돈을 써요? 차라리 그 돈으로 뭘 하나 사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그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고 흥미로워서 배웠던 것인데, 누군가는 실질적인 결과물이 없는 배움은 쓸모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관계에 있어서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오답노트다. 사람마다 이성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오답노트에 쓰이는 내용은 다를 수 있다.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 경험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애 오답노트도 만들어보았지만 그것은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난 뒤에야 쓸 수 있고, 하나하나 들춰볼 때마다 아프기도 했다. 그에 비해 소개팅 오답노트는 심리테스트 문항을 풀듯 쉽고 간결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들을 통해 나의 취향과 기준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그래서 소개팅을 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끼거나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면 한번 만들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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