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썸'이라는 용어는 이제 지식백과에도 나오는 단어가 되었다. 찾아보니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사귀는 듯이 가까이 지내는 미묘한 관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 때 많이 들었던 동명의 노래도 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너' 이 노래 가사처럼 무슨 사이인지 헷갈리는 상태가 썸이다. 정리해보면 사귀자는 고백이나 분명한 관계 설정 없이, 이성으로서의 만남을 지속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썸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본격적인 연인으로 발전하기 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마음이 간질간질한 그 느낌을 대부분 알 것이다. 사실 사귀기 전의 썸 단계가 더 설레고 좋다는 이유로 이 과정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냥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노래 가사의 말미에도 '피곤하게 힘 빼지 말고 어서 말해줘. 사랑한단 말야'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상대에게 가지는 호감을 수치화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0에서 시작하여 각자가 50 정도의 수치에 이를 때까지가 썸의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호감 수치가 50 이상으로 넘어가면 진지하게 연인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이고 그때부터 연애가 시작된다.
문제는 사람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서로의 수치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게임을 하면 캐릭터들의 남은 에너지 게이지가 상단에 표시되는 것처럼, 상대의 머리 위에 나에 대한 호감 수치가 보이면 좋겠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생각. 그렇다면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밤새 고민하거나 애태우는 일도, 혼자 급발진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호감 수치 최상..!!ㅎㅎ
이성과의 만남이 항상 호감에서 썸으로, 썸에서 연애로 넘어가는 순조로운 과정을 거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세계의 썸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는데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당황스러운 썸이 있는가 하면, 이쯤 되면 고백을 하고 사귀어야 될 것 같은데 상대가 아무 말이 없어서 답답한 썸도 있다. 나 역시 두 가지 경우 모두 경험해보았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남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듯하다. 나이가 있으니 빨리 결혼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조급해서, 적당히 조건만 맞으면 바로 사귀려고 하는 '금사빠' 스타일, 반대로 더 이상 불필요한 연애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는 싫기 때문에, 결혼까지 이어질 사람을 찾기 위한 신중함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 재는' 스타일.
내가 만난 '금사빠' 스타일의 남자 A는 만난 지 세 번 만에 고백을 했다. 그때 솔직한 나의 마음은 '이건 뭐지?' 하는 당황스러움이었다. 대체 뭘 보고, 어떤 면에서 느낌이 왔다고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A는 어느 모임에서 만나 알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그날부터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첫날은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라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집에는 잘 들어갔냐,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앞으로 모임에서 자주 보자'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침저녁으로 종종 카톡을 하더니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영화 보는 걸 좋아했기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두 번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간단하게 밥을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시러 갔었다. 그런데 맥주 한잔을 마시더니 뜬금없이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혀 마음이 없는 사람과 두 번씩이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런 나의 행동을 그린라이트로 여길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연애에 있어서는 다소 신중한 편에 가깝다. 그래서 소개팅이나 선으로 만난 사람도 '진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두세 번 정도는 만나보는 편이다. 고작 몇 시간 함께 하는 한 번의 만남으로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세 번 만나보고도 나와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 정중하게 거절을 한다. 이런 나의 방식이 가끔은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의 호감 수치는 겨우 10~20 정도를 오가는 중이었고 A는 혼자 50까지 달려와 나에게 고백을 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로 거절을 했다. 그 후 A는 내가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로 몇 번인가 더 연락을 해왔지만, 그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워서인지 더 이상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반대로 '너무 재는' 스타일의 남자 B와는 썸의 관계로 무려 3개월을 만났다. 부모님의 지인분 소개로 만났으니 '선'으로 만난 사이었는데도 말이다.
보통 소개팅이나 선의 경우는 '잘되면 사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기에 썸의 기간이 더 짧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3개월 동안 만난 횟수가 적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의 일주일에 2번씩 꼬박꼬박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도 보고 주말이면 근처에 여행도 갔다.
이른바 썸 단계에서 할만한 일은 다했는데 이 남자, 고백을 하지 않았다. 만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답답한 나머지 내가 먼저 관계 설정에 대한 뉘앙스를 비쳤으나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관계에 지친 내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말했다. 사귀지도 않을 건데 그런 상태로 계속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만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의 호감 수치는 이미 50에 가까워져 있었으나, B는 50 아래쪽 어딘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사귈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고민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50에 가까웠던 나의 호감 수치는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다.
아마 B에게 나는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고백을 할 만큼 좋지는 않은' 그런 상대였을 것이다. 자존심 상하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적당한 썸의 기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나 역시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원론적인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적당한 썸의 기간이란 복잡한 요소가 관여하여 산출되는 결과값이다. 그 요소에는 만남의 횟수, 서로의 호감이 커지는 속도, 애매한 관계를 용인할 수 있는 각자의 인내심 같은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나의 호감과 상대의 호감이 비슷하게 커져서 서로의 마음이 무르익었을 때,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시기적절하게 고백을 해야만 연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고 별다른 감정도 없는데 혼자 달아올라 불쑥 고백을 하는 금사빠도 부담스럽지만, 신중함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 재는 상대는 더 싫다. 그런 사람에게는 호감이 있다가도 결국 마음이 식어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대신 어느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호감이 생겼다면 간 보지 않고 직진해오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혼도 결국 연애를 해봐야 결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연애를 건너뛰고 결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30대의 연애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20대처럼 자유롭게 만나보고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기엔 이미 나이가 많다고 느껴서일까.
30대가 되어도 여전히 연애는 어렵고 잘 모르겠다. 난이도로 따지면 인간관계 중 최고 난이도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남녀가 만나서 호감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해 일상을 공유하며, 깊은 관계가 되어 확신을 가지고 결국 결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클리어하고 잘 살고 있는 부부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