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전히 혼자 있을 때 충전이 되는 사람이 있다. 나의 경우 어릴 때는 전자인 줄 알고 살다가 나이가 들수록 후자임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다. 독립하여 혼자 사는 사람들은 따로 약속만 안 잡으면, 퇴근 후 몇 시간쯤은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으니 그나마 좀 낫다. 그러나 나처럼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경우에는 그게 쉽지가 않다.(사이가 좋고 친밀한 가족이라면 더욱더)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보거나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어서 저녁만 먹고 내 방으로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은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나와서 과일 먹으라고, 티브이에 재밌는 게 나왔는데 같이 보자고, 자꾸만 부른다. 귀찮아서 안 나가면 엄마는 아예 내 방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엄마랑 너무 친해도 문제다...)
직업 특성상 하루 종일 사람을 대하다 보니, 사실 직장에서 많이 바빴던 날은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의 말을 들어줄 기운조차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상황을 모르는 부모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데,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낼 때가 있다. 처음에는 순간 짜증을 내고 미안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것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들과 함께 할 때 괜스레 마음이 뾰족해지거나 짜증이 난다면, 이것이 바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속에 적색경보가 울리기 시작하면 잠시 집을 벗어나 밖으로 나간다.
혼자 나가서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풀리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결국 내가 산책을 하는 것은 오롯이 혼자가 되어 관계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이다.그래서 나의 산책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있다. 휴대폰은 무음으로 하고 가급적이면 휴대폰을 보지 않을 것.
우리는 스마트폰 덕분에 SNS와 메신저로 원하든 원치 않든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혼자가 되고 싶어서 나가는 산책인데 그 순간조차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걷는다면 산책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스스로의 의지로 그 연결을 끊어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의지로 이런 연결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도 훨씬 줄어든다.
또한 어디선가 연락이 올까 봐(크게 연락 올 사람도 없지만) 휴대폰에 온 신경을 쓰고 있으면, 정작 나 자신에게는 집중할 수가 없다. 산책하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외부와의 연결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경험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산책을 하는 동안만큼은 누군가의 딸, 직장인 같은 역할인 자아가 아닌, '그냥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에 요구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역할인 자아가 나 자신을 잠식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어떤 역할로서의 나'가 아닌 '그냥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어느새 산책은 나의 소중한 루틴이 되었다. 요즘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뿐 아니라, 고민거리가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도,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 때도 산책을 나간다. 걷다 보면 기분도 한결 나아지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생각 정리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해보기도 하고, 미래를 그려보며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보고, 때로는 그저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주변을 바라보기도 한다. 걷다 보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은 덤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산책을 처방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