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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n 08. 2020

좋은 사람 되기 연구

과학책 읽다 들여다 본 내 속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쉽게 화내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먼저 누군가를 미워하지는 않는 사람. 고등학교, 대학 시절 나는 싫은 사람을 대할 때는 표정에 다 드러났고 누군가에게는 말을 공격적으로 할 때도 많았다. 그 결과로 불편한 상황에 처할 때가 종종 있었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기도 전에 선입견으로 먼저 싫어했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가장 다정해야 할 연인에게 화를 내던 내 모습이 떠올라 자책하기도 했다.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기준을 세웠다. 한결같은 사람이 되자. 늘 친절하고 쉽게 화내지 않으며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아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 불편한 상황에 처할 일도, 화를 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쉬웠다. 어차피 회사에서 막내였으니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시간이 지나서 혼자 곱씹으며 후회하는 그런 일은 없어서 좋았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런대로 잘 지켜지고 있던 나의 기준에 의구심이 드는 일이 생겼다. 


회사에서 우연히 다른 팀의 중요한 전화를 대신 받게 되었다. 전달할 내용을 메일로 보냈는데 담당자가 늦게 확인했고 결국 계약이 파기되었다. 다른 팀의 상급자와 면담을 했다. 왜 면담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내게 그런 중요한 문제는 메일 말고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했어야 했다고 마치 조언처럼 말했다. 확인을 하지 않은 사람의 잘못이 아닌가 의아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일단 알겠다고 했지만 표정은 나도 모르게 어두워졌다. 그러자 그는 평소에도 이런 표정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답하면서 황당한 심정으로 헛웃음이 나왔는데 그는 거봐. 웃으니까 좋네.라고 말했다. 내 기준대로 행동했지만 문을 닫고 나오면서 뭔가 잘 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사를 보면 새로운 가설을 억압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새로운 가설이 인정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는 천동설과 지동설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설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였던 천동설을 파기하지 않기 위해 새롭게 관측된 쏟아져 나오는 증거들을 복잡한 수식을 갖다 붙여 유지하려고 애썼다. 거기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는 단지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이 다할 때까지 집 밖으로 한 발도 나가지 못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아인슈타인조차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며 양자역학 이론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고 자신의 가설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지 못했던 볼츠만은 자살했다. 과학사와 관련된 책에는 이런 내용들이 종종 등장하고 나는 흥미롭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지만 남의 이야기처럼 그런 내용들을 읽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러 가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그 가치를 단지 오랫동안 적절하게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진리인양 믿어버린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나를 위해서 만든 기준이 나보다 위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미 그전부터 버거운 순간이 많았다. 다만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처음부터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준대로 노력해도 그렇지 못한 순간이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인사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순간은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니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혼날까 선생님이 무서워 규칙을 지키는 아이처럼 행동할 때도 있었다.

 


내가 상처를 덜 받고 덜 괴롭기 위해서 그 가치를 지키려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오히려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더 괴로워지고 있었다. 화를 참아 상황을 넘겨도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화를 내고 후회하는 대신 그 순간에 화를 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쌓아 놓은 화를  뒤늦게 아무렇게나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느라 정작 가까운 이에게 서운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결국 곱씹는 순간들은 다시 많아져 갔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친절하려 노력하고, 적을 만들지 않고 잘 웃는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내 가설은 내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남기고 없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지는 계속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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