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내 나이 스물한 살에 만화방에서 밤을 지새며 불법 복제한 일본 만화를 윤문 하다가 잠들어서는 기소중지자를 사냥하고 다니는 형사에게 신분증을 제출하기 위해 잠을 설치는 따위의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란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본인이 바란 대로, 그리는 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문득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곳에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휑하고 햇볕이 쨍하고 내리꽂는 사막에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황망하다. 처음 그런 느낌이 든 건 언제였을까. 스무 살 언저리에는 늘 열심히 하면 간절하면 다 주어질 거라고 내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믿는 사람은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않으니 그저 자책만 있을 뿐 다른 감정은 끼어들 길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들어와서도 계속 바랐던 전공에 관련된 일을 졸업반이 되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깨닫던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황망한 마음으로 봄날 꽃나무가 가득한 학교를 걸어 다니며 나는 뜨거운 모래에 발바닥이 타 내려가는 심정이었다.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디로 딛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방향이라도 알 수 있을까 생전 처음 사주를 보러 갔다. 관운은 없지만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고 사주 봐주는 아주머니 앞에서 갑자기 서럽게 울어 같이 간 친구도 아주머니도 놀라게 만들고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한참 동안 우는 나를 달래고는 집에 방 하나가 비었으니 언제든지 들어와 있어도 된다고 복채도 받지 않던 아주머니에게 고마웠지만 이 또한 내가 하고 싶었던, 내가 그린 인생과는 영 동떨어진 장면이라고.
그 이후로는 줄곧 그런 기분으로 살았다. 삶의 궤적이 크게 도는 곳마다 내가 이런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보곤 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취업을 바랄 때에도 이런 회사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다. 어긋나 버린 궤도가 다시 돌아가는 요행을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궤도를 돌리려면 더 많은 노력과 거기에 따른 운이 필요했다.
어느 날 오래된 건물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벽면에 온갖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처음 가는 곳도 아니었는데 그 날은 벽에 붙은 스티커들에 눈이 갔다. 여러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 중에 나이트클럽 웨이터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짱구 연락처 입구에서 짱구를 찾아 주세요. 개그 소재로도 쓰고도 이젠 쓰지 않는 흔하디 흔한 문구. 짱구라는 이름의 웨이터가 된 그 사람은 한 번이라도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되어서 짱구라는 예명을 가지고 술집 화장실에 스티커를 붙이게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있을까. 뒷목 언저리가 서늘해서 술이 깰 것 같았다. 화장실을 나와 다시 시끄러운 테이블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서늘함은 금세 사라졌지만 이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그 스티커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제야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간절히 기도한다고 이뤄지지 않음을, 예상한 것들이 맞지 않음을 더듬더듬 알아가면서도 관성처럼 간절해지고 예상하는 일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 느낌이 수학 문제를 풀었지만 답을 알 수 없는 것 같다고 언젠가 일기에 나도 쓴 적이 있었다.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겠지. 더듬거리며 알게 된 것들도 사실 정답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살아보니 아니더라. 뒤늦게 혼자 중얼거릴 뿐. 김연수가 여행스케치 2집을 들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사막에 갑자기 떨어진 것 같은 그때에 나는 김윤아 3집을 계속 들었다. going home을 들으며 울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며 냉소에 빠졌다를 반복하다 보니 사막을 지나와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 - 김윤아
https://www.youtube.com/watch?v=oDK0pWlhLBc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꽃들이 만발하네.
잔인한 봄, 잊지도 않고
내 뜰로 날아든다.
맺어지지 않을 꽃들도
저마다 향을 뿜고
하릴없이 피었다 진다,
나를 조롱하듯이.
버려진 나의 뜰에도
나비가 날아들어 오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그리고 무엇도 남지 않네.
봄이 와도 꽃이 피어도
찾아오는 이 없고
잔인하고 이상한 이야기만
내 뜰에 가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