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엔 초승달 벌써 올라와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본디 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내가 경험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대하면서 나는 소통이 과연 어떤 것인지 여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한 여자애와 헤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했던 나만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나는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힌 슬픔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로소 나는 그 바깥의 슬픔에까지도 눈을 돌리게 됐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김광석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몰랐던 것 같은데 대중음악 동아리를 하면서 그의 거의 모든 노래를 알게 되었다. 공연에도 올리고 축가도 하고 선배들이 부르는 것도 들으면서 그의 노래가 내 추억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공연에 올렸던 것도 기억에 남긴 하지만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마음에 남는 장면은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를 할 때였다. 하나둘 흩어지고 남은 사람들끼리 학교 잔디밭에 모여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런저런 노래들을 부르다 보면 늘 김광석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되었다. 노래 좀 한다 하는 사람이 부르기 시작하면 가만가만 조용히 따라 부르다 그 소리가 하나 둘 점점 커져 어느새 합창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 역시도 세상을 다 알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되는 줄 알았던 내 바깥의 세계는 잘 모르는 인간이어서 그 가사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길 없이 취한 기운에 6월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새벽 기운에 젖어 열심히 몸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금방 외웠지만 그 가사들의 뜻을 절절히 알 게 된 건 그렇게 노래를 백 번은 넘게 부르고 난 뒤였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밀실이었던 내 세계도 시린 벌판에 몇 번을 서서 살이 에이고 시렸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그 당시 동아리에서 만난 연인과 동아리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놀고 있었다. 내가 연애할 때는 김연수 작가가 학교 다닐 때와 달리 비밀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몰래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늘 할 일이 많았던 동아리 특성상 둘이 있을 시간이 정말 부족했다. 그래서 늘 사람 많던 동아리 방에 둘이 있던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듯하다. 그때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불렀을 때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너무 못 해서. 악보 한 번 손 한 번 보며 더듬더듬 부르다 아이 참 가만히 잘 들어보라는 그 말에 웃음을 참고 정처 없이 떠도는 손과 눈을 번갈아가며 지켜봤다.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몰랐던 때라 헤어지고야 그게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 잘 못해도 너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손이 떨려도 정처 없이 어느 건반에 손을 올려야 할지 몰라 헤매더라도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헤어지고 김광석의 노래를 목청이 터지게 부르던 뒤늦게야 알았다.
어느 선배를 짝사랑하던 시절에는 그 선배가 기타를 치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 날들'을 부르는 모습을 보며 멋있다고만 생각했지만 그 역시 그 노래 안에 뒤늦게 알게 된 사랑에 대한 후회를 담았을 것임을 그로부터 더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새벽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그 날이 마지막임을 알았다면 시간을 내서 간 바다의 석양빛을 보며 소중히 기억하려 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그 목소리를 담아 두었을까. 우리는 모두 모여서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했고 불렀다. 모두 같은 노래를 열심히 합창했지만 그 속에 떠올리던 사람은 각자 달랐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안에는 보편적으로 우리 모두의 추억을 둘러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떠나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리워하며 그 노래를 다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