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병정 마르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닐고 싶은 날씨였다. 봄바람이 살랑이는데 누가 마다할 텐가? 그대로 곧장 걸어가 강가로 향하며 일부러 발걸음을 장난감 병정과 같이 씩씩하게 가져가려 노력했다. 그러자 걷는 것에도 오히려 흥이 나기 시작했다. 가끔씩 쓰잘데기 없는 바보 짓거리는 자신이 특이한(특별한) 사람이란 확신을 준다! 그런 확신은 이따금 아주 즐겁다."
마르셀에 대한 소개가 없이는 쾰른을 얘기하기 힘들다. 우린 마르셀을 만나러 일부러 쾰른을 들렀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지갑에 헤어진 여자 친구의 증명사진을 넣어 다니며 나 같은 아무개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멋진 찌질이다.
마르셀은 나보다 8개월 먼저 태어난 쾰른 태생의 독일인이다. 단정하고 자연스런 갈색 머리를 하고,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약간 어눌한 말투를 구사한다.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도 어눌하다. 어떤 언어를 구사 한다한들 어눌할 것 같다. 나는 슈투트가르트 근방의 한 작디작은 마을에서 우프(숙식을 제공받으며 일을 해주는 제도)를 하기 위해 플로리안의 농장을 찾아갔다.
마르셀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온 우퍼였고 굉장히 멋진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농장의 우퍼는 총 3명이었다. 한 명은 시몬이라는 프랑스인인데 그는 엄청난 뺀질이 사고뭉치로 어떤 일도 마음 놓고 맡기지 못하는 전형적인 베짱이형 파리지앵 대학생이다. 그에 반해 마르셀은 건실하고 진중하지만 어수룩함이 있는 전형적인 지방 출신 독일인이다. 나는 어딜 봐도 전형적인 다다이즘의 대가이다.
그래도 시몬은 귀여운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웃음기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인데, 무슨 일을 당해도 웃었고 어떤 일을 저질러도 웃었다. 수많은 실수들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허탈해서 웃거나 마음이 약해져 웃었다. 유머 감각은 곧 수용력인데 시몬은 사람의 유머 감각을 키워주는 상대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상대다.
어느 날 마르셀과 나를 비롯한 모두는 새벽의 이슬을 헤치며 밭에 나가 양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서늘한 아침의 공기가 데워질 무렵, 시몬이 밭으로 나왔다. 그는 매일매일 일이 끊이질 않는다며 투덜거렸고 쉬기를 원했다. 마음 약한 플로리안은 흔쾌히 그러라고 말했고 공정함을 위해 나와 마르셀도 쉬게 해 주었다. 우리 셋은 요한나의 집에서 점심을 든든히 얻어먹고 산악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플로리안의 마을은 산 중턱에 있어 사방팔방 어느 쪽으로 향하든 산길이다.
마르셀은 지그재그로 이어진 산길을 단숨에 올라갔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한 바퀴씩 페달을 돌려 마르셀을 따라잡았다. 허벅지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고 싶진 않았다. 알 수 없는 자존심은 불굴의 인내심의 원천이다. 시몬은 조금 올라오다가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셀과 나는 시몬을 내버려두고 자전거를 타고 산악을 누볐다. 통나무에 걸터 앉아 가방에 담아온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숲의 향기가 났다. 게르마니아 숲의 향기다. 로마인이 게르만족과 싸우던 야만의 숲. 카이사르의 일대기를 읽으며 그려왔던 그 숲 어딘가에서 내가 게르만의 후예와 맥주를 마실 거라곤 상상치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르셀이 굉장히 이국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마치 함께 있지만 함께 있을 수는 없는 사람처럼.
게르만 족의 후예와 단군의 후예가 독일 Großhöchberg 근방 어느 숲에서 함께 bitburger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 위에 앉아 맥주병을 흔들던 마르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사람은 다 똑같다'는 표현이 있는데 나는 절대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정말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동안 시몬은 아주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마르셀과 내가 흙먼지에 싸여 마을로 돌아갔을 때, 시몬은 사과주를 마시며 동네 처녀들(10대 소녀)와 베란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한낮에 맥주를 마시고 취한 미친 호숫가에서의 일, 피자를 먹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었던 미친 하루, 폴란드 출신 노동자인 마틴의 캐러반에서 카드 게임을 하며 미치도록 맥주를 마셨던 시간, 독일이 4번째 월드컵을 들어 올리던 미친 날 등등 그곳에서의 일을 서술하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여기선 그곳의 이야기는 담아둘 것이다.
어쨌든 마르셀과 나는 마음이 통했다. 플로리안의 농장에서 보낸 마르셀과의 마지막 밤은 독일이 월드컵에서 또다시 우승을 일궈낸 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개의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밤을 즐기고 있었다.
창고로 사용하는 건물 외벽에 빔 프로젝트를 쏘아 모두 함께 결승전을 보았다. 아르헨티나가 맥없이 무너졌고 독일은 브라질에 이어 아르헨티나까지 격파하며 남아메리카 대륙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렸다. 독일은 네 번째로 세계를 제패하고 월드컵을 들어올렸다. 무뚝뚝한 독일인들은 한번 '와!'하고 소리를 지르고 마당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잤을 뿐이다. 월드컵을 우승했는데 그들은 그냥 잠을 잔다. 다음날 새벽에 양배추를 수확해야 한다. 그게 독일인이다. 나는 독일인이 아니라 그런지 뭔가 아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눕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주위가 고요했는데, 무언가 빠진듯한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맥주를 들고 마르셀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와 헤어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짧은 날의 인상과 앞으로 나아갈 날의 계획에 대한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게르마니아에도 카시오페이아가 떠 있다. 모두 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뿐. 다만 익숙하지 않은 곳에 있을 뿐.
"한 달 정도 후에 여자 친구가 독일에 올 거야. 우린 여름 동안 유럽을 여행할 거야."
내가 마르셀에게 말했다.
"그거 정말 멋진데! 어디를 가는데?"
마르셀이 갈색 눈썹을 움직였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일정도, 목적지도."
"쾰른에 올 거야?"
"모르겠어."
"쾰른을 들러. 내 집에서 자도 되고, 내가 쾰른 시내 구경도 시켜줄게."
"정말 그래도 될까? 낯을 많이 가리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래 준다면 그것보다 좋을 순 없지."
"일정을 정하면 알려줘!"
여자 친구와 함께 쾰른으로 향하는 짧은 열차에서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르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녀는 마르셀에게 반해버렸다.
쾰른 도심의 중앙역에서 내려서서 핫도그를 씹어 먹으며 마르셀을 기다렸다. 마르셀은 낡은 남색 볼보를 타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25분 거리에 있는 그의 집을 향해 달리며, 그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우리에게 몇 가지 상호 예의적인 질문을 했다. 수줍은 내 여자 친구는 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나는 마르셀에게 그녀를 대신해 대답을 건넸다.
아, 아름다운 수줍음의 간극들. 다다이즘의 대가인 나도 그런 미묘한 순간의 떨리는 즐거움을 거부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