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only living boy Apr 29. 2019

사랑 여행기 [쾰른 편]
어리석었던 소중한 시절

조깅, 산책, 소나기와 이야기

" 오 감사합니다. 오 감사합니다. 제게 생명을 주신 모든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그저 폐와 심장의 박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랑스런 눈빛과 따스한 손길로 저를 살아가게 한 그 모든 이들, 그 모든 기억들에 감사합니다."


 마르셀이 사는 마을엔 냇물이 흐른다. 물이 있는 곳엔 나무와 풀이 자란다. 나무와 풀이 자라는 땅엔 고운 흙이 있으며 흙 속엔 벌레와 미생물들이 산다.

 토스트와 우유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마르셀과 나는 함께 조깅을 나왔다. 나의 여자 친구는 오전의 여유를 즐기며 집에 남겠다고 했다. 나는 닫히는 문 뒤에서 그녀에게 짧은 입맞춤을 했다. 복숭아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마르셀은 자주 조깅을 한다고 했다. 그런 마을에 살면서 조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 마르셀.

 우리는 녹음 사이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를 가르며 가볍게 달렸다. 오래 달리기는 언제나 자신 있다. 걷는 듯 뛰는 듯 마르셀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마르셀, 어쩌다 플로리안의 농장에서 지냈던 거야?" 내가 마르셀에게 물었다.

 "아, 사실 플로리안과 나는 먼 친척이야. 엄마의 먼 친척이지. LEE, 너도 잘 알겠지만 플로리안과 요한나의 농장은 타협하지 않고 유기농법을 사용해 모든 작물을 키우고 있거든. 이제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나는 플로리안에게 유기농법을 배우고 싶어."

 "앞으로 플로리안같이 농장을 경영하는 농부가 되고 싶은 거야? 너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고 했잖아?"

 "응, 그냥 적성에도 잘 안 맞고, 나한테 맞을 만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어서. 나는 자연 속에서 지내고 싶어. 화학 공부를 한 것도 농사를 짓는데 나름 유용한 지식이 되기도 해."

 "독일 사람들은 모두들 어릴 때부터 목표랑 확한 미래를 가지고 자라서 대학 졸업하면 다들 확한 직업을 가지고 평생 사는 줄 알았어."

 "어떻게 모두가 그렇겠어, LEE.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나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어.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한국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럼 가서 내 얘기를 해줘. 연구소에서 8년 화학 공부를 하고 이제 새롭게 농사꾼이 되려고 한다고 말야."

 "그런 사실은 몰랐어."

 "앞으로 몇 달 후에는 여기 생활을 정리하고 플로리안의 농장 근처로 가기로 했어. 차근차근 처음부터 일을 배우려고. LEE, 너도 다시 와서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정말 즐겁겠다."

 "다시 가면 시몬과 마틴도 있을까?"

 "둘 다 없을걸."

 "그럴까?"

 "LEE, 마틴은 폴란드로 돌아가야 할 거야. 비자 문제가 있으니 오래 있진 못 할 거야."

 "그래?"

 "LEE,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마틴은 불법체류자이고, 그래서 원래 받아야 하는 임금의 반만 받고 일하고 있는 거야. 우린 편하게 숙식했지만 마틴은 캐러반에서 홀로 고생을 하고 있잖아. 란드나 동유럽에서 마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와. 독일 젊은이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플로리안과 요한나는 지출을 줄여야 하니까......"

완벽히 평화로운 마르셀 마을의 냇가

 우리는 냇가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 좋았다.  

 "네 여자 친구가 걱정되는데. 혹시 내가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나? 잠자리는 어땠어? 그녀도 마음 편히 즐거운  맞을까?"

 마르셀이 물었다.

 "모두 다 좋았어. 그녀는 단지 수줍을 뿐이야. 그녀는 모든 걸 좋아하고 있어."

 마르셀은 내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마음을 잘 들여다봐. 그녀가 반드시 너와 같을 거라고 여기지 마. 언제나 그녀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해 봐. 물론 쉽진 않을 거야.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

 "우린 특별한 노력을 하진 않아.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건 이미 어려운 관계가 아닐까? 강물은 자연스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 용을 쓰며 애써 흐르지 않아. 우린 특별한 노력 없이도 무슨 일에서든 서로의 최고의 응원군이 되고 있어."

 마르셀은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내 얼굴을 바라보기도 하며 두리번거렸다.

 "LEE.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지.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꾸준히 생각해왔어. 그래서 내가 결국 내지 못했던 것들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야......"

 "LEE, 사랑은 하나의 생명체 같아서 깨끗한 물과 공기가 없으면 죽어버려. 그녀를 듣고, 그녀를 느끼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 잘 들여다봐. 눈치를 보라는 뜻이 아니야. 보살피라는 거야. 소중히,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그녀라는 여자를, 그녀와의 관계를."

 "알고 있어. 자만하지 않아."

 "LEE. 사랑에 있어 자신감과 자만심은 같은 거야. 다만 상대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불릴 뿐이야. 잊지 마."

 

 마르셀과 대화를 나누면 그가 나보다 8개월이 아니라 8년을 더 산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르셀, 사람은 물에 빠지기 전까진 숨이 막히지 않아. 사람은 겪기 전까진 배우려 하지 않. 같은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바랐던 게 나라는 인물이야.


 마르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여자 친구가 몹시 그리워졌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샤워도 하지 않고 그녀를 와락 안았다. 그녀는 씻고 나오라며 나를 밀쳐냈다.


 오후엔 마르셀이 볼일을 보러 나갔다. 여자 친구와 나는 둘만의 점심을 차려 먹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보기 위해 산책을 나갔다. 오전에 마르셀과 뛰었던 길을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걸으니 말랑말랑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마르셀을 대함에 있어 그가 신경을 많이 쓴다며, 그녀가 조금 더 편안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얘기할 순 없지만, 난 누군가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평가의 눈빛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비웃음으로.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절대 그렇지 않아. 그리고 나나 마르셀은 절대 그렇지 않아. 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과도한 신경을 쓰고 있어."  내가 말했다.

 "그래, 나는 사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착하게 보이고 싶어.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친절해 보이고 싶어. 언젠가 오래전부터 그랬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멍청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행복하고 싶다기보다는 불행을 떠안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내가 바보 같겠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오빠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런 오빠의 인식까지도 나는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걸. 이건 하나의 특질이야. 내가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타고난 특질이라고. 더 이상 나를 다그치지 말아 줘."

 "아니야, 다그치는 게 아니야. 나도 똑같아. 남한테 어떻게 보일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지만 단지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뿐이야...... 나도 남한테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진 않을 거야. 그건 네 말대로 어쩔 수가 없는 인간적인 부분이니까."

 "오빠도 그리 신경을 쓴다고?" 그녀가 놀랐다.

 "그래. 나는 항상 카메라 감독처럼 내 모습을 제삼자의 눈으로 돌려보곤 해. 바보 같진 않았나, 어리숙해 보이진 않았나, 차갑거나 멍청해 보이진 않았나. 코털은 안 삐져나왔나, 표정은 어색하지 않았나. 그리곤 끝없이 두려워해."

 "오빠는 그러지 않은 줄 알았어."

 "나는 타고난 배우니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지만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마르셀에게 내가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해줘. 마르셀의 호의에 감사하다고 말이야." 그녀가 내 팔을 감싸며 말했다.

 "마르셀에게 직접 말하지 그래?" 내가 대답했다.

 "차라리 편지를 남길게."

 나는 그녀가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맞았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벼락처럼 비가 내렸다. 천둥도 쳤다. 나와 여자 친구는 억수 같은 빗줄기 속을 달렸다. 그녀가 힘들어 하기에 잠시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했다. 과묵한 독일 할머니 한 분이 벤치 끝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반대편 끝부터 나란히 앉았다. 순식간에 홀딱 젖은 그녀를 닦아주기 위해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벗어 그녀에게 주었는데, 그녀가 화들짝 부끄러워하며 다시 입으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젖은 티셔츠를 입었다.

 예고도 없이 내리는 소나기여서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었다. 쉬이 그치지 않을 것만 같은 아주 굵은 빗줄기.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고 그녀는 내게 머리를 기대어왔다. 그녀가 난데없이 내게 재밌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고 나는 알퐁스 도데의 어느 단편 이야기를 해주다가 모파상의 다른 단편의 장면과 헷갈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이따금 내게 그런 요구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좋다.

 

비가 그친 오후, 밝은 빛이 비치는 마르셀의 베란다

 도무지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우리는 다시 마르셀의 집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정류장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행복한 기분으로 빗속을 달린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집에 도착했다. 마르셀이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우리는 뜨거운 물로 함께 샤워를 했고, 정말 진한 커피를 내렸다. 하얀 우유를 타서.

 정말 웃긴 것은 우리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 있던 일이다. 사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게 웃기다. 아주 감쪽같다.

 베란다에 앉아 소나기가 그친 오후의 바깥세상을 내다보았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라고 변명하듯 땅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어떤 아름다운 순간은 하루 전체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어떤 꿈같은 하루는 계절 전체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어떤 시절은 너무나 소중해 도저히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여행기 [쾰른 편]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슬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