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의 신비로운 자연과 자연계가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세계
러시아 근대 화가들의 작품이 가득한 전시장에서다. 그 표현력을 존경해마지 않는 일리아 레핀(Il’ya Efimovich Repin;1844~1930)의 마력적인 그림을 비롯해 낯선 화가들의 풍경화가 한껏 눈길을 끌며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언제 보아도 즐겁고 언제 만나도 반가운 자연이요 풍경의 세계다. 한껏 풍요롭고 넉넉해 보이는 들판이요 외로움의 언덕이며 침묵의 강이다. 특히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1837~1887)의 대작「달밤」은 어스름에 젖은 숲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흰옷 차림의 젊은 여인을 그린 것인데 자신이 주로 종교화를 다루었던 때문인지, 그림 전면의 호수와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여느 풍경화와는 무척이나 맛깔 다른 그림이다.
서양화 대개가 그러하거니와 이네들의 풍경화는 우리의 그것과 빛깔이 무척이나 다르다. 이는 기본적으로 풍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우리와 색감이 다르고 붓놀림이 다르며 마무리감이 서로 같질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사람들의 그림은 같은 녹색이나 황토색이라 해도 채도가 떨어져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고 때론 색깔 자체가 복고적인 향수감을 자아내 독특한 뉘앙스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과는 또 다른, 그림으로 만의 신비로운 자연이다.
서로 다른 작곡가의 음이라도 감상하듯, 분위기와 내용 다른 그림들을 들락거리는데 문득 묘한 풍속화 한 점이 나선다. 풍속화라기보다 초등학교 교실의 정경인데 산수 문제가 적힌 칠판 앞에 어린이들이 모여 답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세로형 40호 정도 되는 그림인데 왼편에는 상당히 지적인 분위기의 선생님이 앉아 있고 아이들은 턱을 괸 자세로 혹은 머리에 손을 얹거나 칠판을 바라보며 암산에 골몰해 있는 모습이다. 답을 찾아내느라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이들과 더불어, 어떤 아이의 귀엣말에 마음 기울이고 있는 선생님의 표정이 완연 살아 있는, 그야말로 한 장의 스틸 사진이다. 나 또한 이 문제가 궁금해져 희끗희끗한 백묵 글씨의 칠판을 바라본다.
(10²+11²+12²+13²+14²)÷365
그림 속의 아이가 되어 그 답을 계산해보니……, 2다.
참으로 신묘한 숫자의 세계다. 한층 신기한 인간의 두뇌다.
이런 문제를 누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 길 없으나 컴퓨터는커녕 계산기조차 없던 시절, 그 많은 자연수 중 제수와 피제수를 이렇게 설정하여 2라는 정수를 유도해낸 게 참으로 흥미롭다. 하기야 수의 세계만큼이나 신비로운 것도 세상엔 흔치 않을 것이다.
가령 1²=1이고, 2²=1+3, 3²=1+3+5, 4²=1+3+5+7, 5²=1+3+5+7+9 등 그 어떤 수의 제곱근이든 이것은 연속되는 홀수의 합이 된다. 이보다 한층 기묘한 숫자 체계도 있다. 앞에서 읽으나 뒤쪽에서 읽어보나 그 값이 똑같은 회 문수(回文數)가 그것이다.
1 =1²
121=11²
12321=111²
1234321=1111²
123454321=11111²
12345654321=111111²
1234567654321=1111111²
123456456787654321=11111111²
12345678987654321=123456789 ×99999999
수의 세계에 문외한인 나로서야 이 믿기지 않는 규칙성이 놀라울 뿐이니 정작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겐 얼마나 경이로운 세계가 전개되고 있을까. 그런데 내 전공에 비추어 정작 놀라운 건 13세기 이태리의 천재 수학자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1170~1250)가 발견했다는 피보나치 수열이다. 이것은 주지하다시피 1, 1, 2, 3, 5, 8, 13… 등 모든 수가 자기보다 바로 앞선 두 수의 합으로 이루어지면서 무한히 계속되는 수의 세계인데 이런 수열이 자연계에 흔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해바라기 씨앗의 나선형 패턴이나 전나무 열매의 인편 혹은 파인애플 인편의 배열 같은 게 그러한데 각기 시계방향과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온 인편 숫자의 비율이 꼭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비례는 우리의 귓속 달팽이관에서 앵무조개 껍질이나 암모나이트 그리고 태풍의 눈이나 우주의 나선 은하에 이르기까지 온 자연계가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세계다. 가령 암모나이트의 정중앙을 중심으로 십자선을 그어보면 나선 따라 생겨나는 작은 반지름에서 점차 커져가는 반지름의 관계가 모두 이 수치를 따르고 있다. 더구나 이 수열 세 번째 이상의 수에서 서로 인접한 두 수 가운데 큰 수를 작은 수로 나누면 어느 숫자 쌍이든 우리가 황금비라고 말하는 1:1.618에 근사한 값을 만들어낸다. 이는 이 비례가 발견되기 천 년도 전에 지어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서양화의 세계에 흔히 드러나고 있고 또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청동검의 손잡이와 칼날의 비례나 조선 목가구 전면의 분할 비례가 이와 같아 수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우리가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더욱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건 이런 황금비가 우리 몸의 비례 전체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가령 자신의 키를 배꼽에서 발바닥까지의 길이로 나눌 때 혹은 엉덩이에서 발바닥까지의 길이를 무릎에서 바닥까지의 길이로 나눌 때 또는 어깨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로 나눌 때도 그러하거니와 손가락마다 끝 마디에서 한 마디씩 올라설수록 2:3:5:8의 비율을 보인다. 미인의 얼굴 또한 가로폭과 세로 폭의 비율이 이를 따르고 있으며 코의 폭과 입의 폭, 눈썹에서 코까지의 길이 대비 코에서 턱까지의 길이 등 이목구비의 관계도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이 값에 준하는 비례가 된다고 한다. 아니 DNA 한 매듭의 가로 세로 비례도 마찬가지란다.
케플러는 자연의 수학적 패턴에 매료되어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수성에서 토성까지의 여섯 개 행성에서 일정한 숫자의 법칙을 찾아내는 둥 여기에 평생을 바쳤다고 하는데 우주 만물에 이런 질서가 숨어 있다는 건, 그리고 이를 찾아낸다는 건 가히 기적이다. 각각의 행성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세제곱 한 값을 각 행성 궤도 주기의 곱으로 나누면 항상 같은 숫자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낸 케플러나, 기원전에 이미 수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학파, 그리고 피보나치 같은 이들의 천재성이 놀랍고도 경탄스럽다.
전시장을 나선 후 도록을 살펴보고 나서야 이 그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1886~1945)가 그린 ‘암산’이라는 작품임을 알게 되었고 또 그림에 등장하는 선생님이 모스크바대학 식물학 교수였다가 농민 자녀들 교육에 나선,라친스키(S. A. Rachinsky;1832~1902)로서 이 그림을 그린 이의 선생님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더욱 감흥이 일어왔다. 이 때문에 전시장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의 동작이나 표정에 매료되어 미처 놓치고만 인물 숫자를 헤아려보니 모두 열한 명이다. 여기에도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아 궁금 키만 한데 그림의 구성 또한 황금비를 따르고 있다. 신비롭기만 한 회화의 세계요 수의 세계며 손의 세계다.
그런데 무엇보다 신비로운 우리의 두뇌는 숫자 아닌 글로도 회문(廻文)을 만들어냈으니, 한시의 세계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다음은 고대 라틴어 회문이다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
(우리들은 밤의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불에 삼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