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마일스 데이비스 : 쿨의 탄생>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 '쿨', '비밥', '즉흥연주' 등을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음악의 'ㅇ'도 모르는 나는 그의 다큐멘터리 <마일스 데이비스 : 쿨의 탄생>을 보며 '흡수'라는 개념을 배웠다. 아주 쉽지만, 정말 강력한 삶의 태도이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마일스 데이비스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그것이라 확신했다.
나에게 재즈란 멋진 슈트를 입지만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소매를 가볍게 걷어올린 멋진 중년 신사의 이미지다. 음악 무지렁인 나에게 클래식과 힙합 사이에 있는 재즈는 스타벅스에서 나오는 너무 난해하지도 너무 지루하지도 않은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재즈라는 음악을 만들어낸 창조자는 적당히 듣기 좋은 그런 음악을 목표로 만든 게 아니었다. 1940년 대 종전과 함께 뉴웨이브가 강하게 일어나던 미국. 낮엔 줄리어드에서 과거의 전통을 배우고 저녁엔 클럽을 다니며 현재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운드를 듣는 마일스 데이비스는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며 자신의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는 뮤지션으로써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했고 그 핵심에는 모든 것을 '흡수' 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어린 마일스는 자신이 듣는 모든 소리를 그냥 듣지만 않았다. 그것들을 따라 하거나 비슷하게 흉내 내보길 좋아했고, 대학에선 위대한 작곡가들의 악보를 봤고, 당대 유행하던 뮤지션들의 사운드를 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주변에 들리는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다. 밴드 멤버들과 식당에서 들은 인도풍의 음악을 듣고 다음 앨범에 적용했다는 그의 일화를 들으며 '그가 만약 한국의 악기와 소리들을 들었다면 지금 재즈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상상을 했다.
흡수라는 단어가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만났을 때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흡수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릴 때 겪었던 가정폭력과 가난을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멘탈의 강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멘탈의 유연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일스는 인종차별, 음악에 대한 전통적 시선,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 등 그 모든 고난을 흡수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흔희 어떤 시련이나 고통을 겪으면 우린 그것에 상처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바로 창고로 보내버린다. '멘붕', '광탈', '포기' 같은 개념을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위로받기에 좋은 말이지만 내 삶을 나아가게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에겐 단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동안 어떻게 처리하고 있었을까?'
나는 힘든 일은 '상처'로, 기쁜 일은 '추억'으로, 평범한 일들은 '일상'으로 이름표만 붙여놓고 지하 창고에 넣어놓기만 했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보기는 커녕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오직 나만의 유일무이한 것임에도 그것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무시하고 있었다.
마일스에게 흥미로웠던 점은 자신이 이뤄놓은 명성에 기대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약물중독, 불안정한 결혼 생활, 분노조절 장애 등 삶을 포기하거나 예술가로서 창작을 멈출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는 새로운 밴드, 새로운 악기를 계속 도입하며 자신이 지금 현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음악으로 녹여냈다.
음악 무지렁이인 나에게 재즈는 여전히 어려운 음악이고, 분위기 있고 싶을 때 트는 음악이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인생은 엄청난 관점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 흡수하라. 설사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그 고통이 아름다운 무언가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