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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예 Apr 23. 2024

이 죽일 놈의 야식

어느 야식 증후군자의 변명

자정을 넘기면 듣고 싶은 곡.

새벽 1시가 넘었는데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무슨 걱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집필의 고통을 한창 맛보고 있는 중도 아니다. 그저 배가 너무 불러 잠자리에 들 수가 없어서다. 이번주는 어떤 주제로 써볼까 고민이었는데, 죄책감과 보상심리 발동으로 부푼 위를 안고 하릴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래 이건 운명이다, 주제는 끊지 못하는 이 야식이야.


나의 야식은 그 시작이 고교 3학년 때가 아닐까 한다. 야자를 끝내고 별 보며 집으로 향하는 15분 정도의 길 동안 머릿속을 채우는 건 입시 걱정도 아니고 마음에 둔 남학생이나 가수 오빠들도 아니었다. 주로 짙은 배고픔이었다. 길목에는 요사스럽게도 맥도날드 삐에로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래도 혼밥할 배짱은 없어 혼자인 경우는 꾹 참아냈지만 동행이라도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그곳에 들러 프렌치 프라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젠가를 하듯이 먹었다. 그때만큼 프렌치 프라이가 맛있었던 적이 또 없다.

맥도날드의 유혹을 피해 집으로 곧장 오면 야식이 없었느냐, 것도 아니다. 나의 성화에 못이긴 엄마가 준비해둔 것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삶은 땅콩이다. 참고로 엄마는 건강염려증, 특히 야식을 건강의 가장 큰 적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이다. 볶은 땅콩은 그저그랬던 나지만 삶은 땅콩만은 멈출 수 없이 손이 갔다. 담백하지만 고소하고 이상하게 물리지 않으며 포만감이 컸다.

대학에 가서는 기숙사 생활을 오래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 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치맥이었다. 거의 1일 1닭 수준이었던 것 같다. 자정이 넘으면 기숙사 입구가 폐쇄되었는데 그래도 먹겠다고 사장님과 모의해 열린 화장실 창문으로 줄을 달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이후에는 친구와 2인 또는 3인으로 자취 생활을 이어갔으니 때때로 야식을 했을 것이다. 이 화려한 도시를 사는 현대인으로 자정을 넘겨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으니 7시쯤 하는 저녁 식사는 어느 새 소화되어 사라진 지 오래, 자리에 누우려 하면 속이 허전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물리적인 허기만은 아니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낮동안 인생의 쓴맛을 보며 고군분투해야 했기에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적인 보상이기도 했다. 실제, 스트레스로 인해 분비되는 혈청 콜티솔이라는 분비물이 잠을 유도하는 호르몬과 식욕을 낮추는 호르몬을 억제한다고 한다. 우리는 호르몬의 노예가 아닌가. 어쩔 수 없다! 스트레스 많이 받은 딱한 나는 보상 받아 마땅하다!, 라고 종종 변명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미혼 시절은 내 야식 인생에 있어 비성수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혼자 있는 밤은 유혹을 꾹 참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들 만했고 식탐이 적은 룸메이트 덕에 "같이 참아 보자"로 의기투합할 때도 많았던 것이다. 특히 '날씬함이 곧 선'이라는 사회적 강요를 가장 많이 받고 있을 때여서 건강과 미용에 해악이 되는 야식을 적으로 곧잘 규정할 수 있었다.


야식 라이프는 결혼 후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때로는 갈등의 씨앗이기도 했고 때로는 대화합의 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와는 달리 남편, J는 야식에 대한 죄책감이 한톨도 없었다. 건강 염려 제로의 가정 환경과 저녁을 건너 뛰고 늦게 퇴근하는 직업 환경에 더해 몸매 관리에서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온 까닭이다. 그에게 있어 야식은 일상적인 식사고 휴식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야식을 먹어댈 거야? 혈관 막힌다 막혀!"

매일같이, 꼭 술을 곁들인 야식 생활에 대해 나는 내 안에 DNA처럼 박힌 죄책감이 발동돼 잔소리를 해댔다. 뇌혈관, 심혈관 문제로 고생했던 아빠를 생각하면 가끔은 그 잔소리가 신경질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분위기가 응당 싸해지기 마련이었다. 내 잔소리로 먹지 않았든, 그래도 기어이 먹었든 간에 J는 잘 때까지 입을 굳게 닫았고 나는 나대로 야식을 참느라 기분이 나빠져 먼저 잔다는 인사도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야식을 해도 분위기가 안 좋을 때가 있다는 거다. 샐러드나 과일, 두부나 닭가슴살 등의 건강식으로 담백하고 가볍게 먹을 때가 그렇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따른 건데 어째 결과가 별로다. 요리를 앞에 두고도 기운이 없고 대화도 없다. 속에는 좋을 거라고 위안을 하며 씹어 삼키지만 나 역시 텐션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혼자 먹을 때는 식욕이 없어 초간단 식사로, 아이와 같이 먹을 때는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메뉴에 맞춰야 했는데 마지막 식사마저 본능적 즐거움을 전혀 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억울했다. 그리고 그날의 노동 강도만큼 그 억울함은 커졌다. 어느 날은 J가 당당히 이렇게 외친다.

"맛있는 거 먹고 싶어. 혈관을 좀 막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본능적이고 솔직한 외침에 웃음이 터진 나는 결국 배달 앱을 켜고 아구찜을, 그것도 차돌박이 500그램 추가해서 주문했다. 그날은 정말 화기애애하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고 평소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도 나왔다. 그야말로 칠링(chilling) 타임이었다.


관계에는 너무 좋은데 몸에는 좋지 않은 야식. 오늘도 나는 이 야식의 굴레에서 허우적댄다. J는 1년에 한번 건강 주간을 가지는데 요즘 그 주간이다. 계획을 해서 그러는 아니라 건강, 몸매 관리를 나몰라라 하다가 1년에 한번 주기로 각성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금연을 하고 헬스장을 끊고 필라테스를 하느라 오전에 부지런을 떤다. 그리고 기껏 만든 근육이 아깝다며 저녁, 아니 야식을 굶는다. 자발적으로 야식을 끊는다니 흐뭇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야하는구나 싶어 섭섭해진다. 마음을 잡으려고 유튜브로 건강 관련 채널을 찾아 본다. KBS 대표 건강 정보 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이다. 야식을 멀리하고 운동하라고 설파하던 프로그램. 하지만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등장시킨 인물들의 일상이 의도치 않게 식욕을 자극해 '생로먹방의 비밀'로 인기를 끌고 있네? 나는 참지 못하고 J에게 문자를 보낸다.

'치팅데이는 오늘이 어때?'

바로 오케이라는 답장이 온다. 우리의 정다운 야식은 이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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