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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과 채찍 Dec 29. 2020

삶 속에서 무슨 질문을 가져야 할까?

'하루 10분 인문학'을 읽고

좋아하는 물건이나 분야가 있어도 모든 종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해도 다크 초콜릿은 싫어할 수 있다. 책을 나름 좋아하지만, 하루에~,  365일 동안 ~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이 필요하다, 하루에 한쪽~ 이런 책들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파편화된 지식을 전달한다. 그런 지식은 읽는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만 , 금세 잊히고는 한다. Youtube에서 정보성 콘텐츠를 봐도 금세 잊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이유로 이 책도 반감이 있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이런 종류의 책도 유용하다는 생각을 <하루 10분 인문학>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인간', '생각', '윤리', '정치와 권리', '과학과 예술'이라는 5가지의 주제를 다룬다. 각 주제에 대해서 10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관련 있는 지식을 알려준다. 그리고 다시 생각할 질문을 던진다. 각 질문이 의미가 있었다. 몇 개의 질문은 깊게 와 닿았다.
  인간 부분의 "나에 대한 앎은 지식의 일종일까?"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간혹 글을 쓰면 글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고민한다. 매일 하는 업무지만 이게 왜 이렇게 되는가? 나는 무엇을 알고 하길래 이렇게 처리하는 가를 고민한다. 관련 지식으로 전달하는 내용도 <소크라테스>와 '산파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앎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무엇에 대해서 무지한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알고 어떤 것에 무지한가? 결국에는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세상이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정글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무지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부딪혀가면서 어렴풋이라도 알기 위한 발버둥을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부분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인 것일까?'를 보면서 내가 가진 진리관을 생각했다. 내가 가진 진리관은 상대주의 가깝다. 상대주의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상대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궁극적인 목표가 없고 각자가 맞다는 생각은 절대적인 답은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는 비겁한 결론에 이른다. 절대적인 진리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아직도 믿는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진리에 접근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윤리 부분은 관심이 많은 영역이라서 10개의 질문에 깊이 고민을 했다. 그중에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의를 경험해야 할까?'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진리관과 연결되는 질문이었다. 절대적인 진리에서는 궁극의 선이나 정의가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절대적인 정의를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지 모르겠다. 만약에 절대적인 정의가 있다고 해도 실현 가능할까? 사람들은 각각의 상태가 다르다. 모두들 만족하는 정의 자체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서 재산이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게 정의라고 하자. 정의에 따라서 재산을 조정하면 이전보다 재산이 늘어나는 사람은  만족하면서 정의롭다고 생각하겠지만, 재산이 줄어드는 사람은 불만을 가지고 정의롭지 않다고 믿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재산을 다 같이 없는 수준으로 만들고 전체를 통제한다고 하면 잘 살기 위한 노력이 줄어들어서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만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올바름의 실행이 목표이지만 모든 사람의 상태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불만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존 롤스>의 정의론을 소개한다. 우선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출발선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규제해서 '운의 중립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기 위해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보장하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불평등한 소수자를 위한 '차등의 원칙과 기회균등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평등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공감이 되었다. 정의는 하나의 가치를 실현한다고 해서 실행되지는 않는다. 정의를 위해서 불의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아야겠지만, 불의가 정의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불의를 정의 발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현재 행해지는 불의도 이런 부분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언젠가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길 바라지만 그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태가 되었다.
  과학 부분에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끌렸다. 현대는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과학은 논리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인다. 주장과 근거가 적절하게 결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 과학적 방법론이다. 주장의 옳고 옳지 않음을 수학적 증명이나 실험을 통해서 증명한다. 과학이 가진 가장 큰 힘은 객관화이다. 객관적인 사실적 근거로 증명하기 때문에 과학을 신뢰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보는 관점은 부당하다. 과학은 완벽한 학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을 다루는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석면'을 불에 타지 않고 내구성이 좋은 제품으로 알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 '석면'을 완전 물질로 받아들였고,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석면'은 1급 발암 물질로 나중에 밝혀졌다. '석면'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시대의 과학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과학을 일반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전보다는 자연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모든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현상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작동하지만, 원리는 인간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과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맞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전달하는 지식은 다소 파편화되어 있지만, 중간중간의 질문으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름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어설픈 자신을 발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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