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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박사 레오 May 19. 2019

성소수자가 용기있는 사람들인 세가지 이유들

심리학자가 읽어주는 세상 이야기. 성소수자의 용기

이 글을 읽기 전에…


제 일의 특성상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공식적인 자리나 글에서 언급하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고자 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이슈에 대한 저의 공개적인 언급에, 혹시라도 제 내담자나 고객분께서 불편하시거나 상처 받으실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올리는 이유 역시 나의 고객이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힘내고 용기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글을 써보았습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불필요한 논쟁을 촉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대신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인한 심리적 어려움 속에 있는 어떤 분들께는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언과 피드백을 주시면서 글을 올릴 용기를 주신 제 내담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성소수자(性少數者/sexual minority)는 성적지향이나 성 정체성 측면에서의 소수자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써,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제3의 성 등 다양한 대상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소수자’라는 이유로 ‘다수자’들에 의한 차별과 사회적 스트레스를 강하게 경험하며, 이로 인하여 상당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의 취향이나 행동이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논의는 학문적 차원에서,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논의할 이슈이지, 평범한 일개 심리학자의 글에서 언급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의 보석 같은 용기를 언급하고자 할 뿐이다. 직업 특성상 어떤 이슈이든 심리적인 어려움을 가진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성소수자들은 극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심리적 어려움도 극심한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그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 자신도 모르는 빛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들을 본인도 잘 모르고 있으며, 타인들은 더욱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더욱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을 주는 사람들은 이들의 탁월한 모습을 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써야겠다는 과감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극심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어떤 보석 같은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1. 적어도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고 산다.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속이면서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가장 흔한 예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철새 정치인들이다. 또한 분명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정말로 믿으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이나 미술을 너무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나 부모의 바람이나 사회적 인정을 따라서 유명한 대학의 소위 세속적인 출세(?!)가 보장되거나 취업이 잘 되는 과에 진학하는 학생도 실제로는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세뇌를 당했을 수도 있거나 혹은 스스로 이런 일반적인 성공 공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기기만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를 이렇게 키워준 부모 탓을 하거나 자신의 바람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사회 체계를 비난하기도 한다. 이 또한 자신의 내적 요구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거나 환경에 요구에 맞춰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에게 위협이 되거나 사회적 압력이 심한 경우에 더욱 심해진다. 회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불합리한 관행이나 큰 논란이 되는 사회적 이슈들을 보면 스스로를 속이고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기기만이 발생한다. 불합리한 관행이나 사내 따돌림 현상을 보면서도 다수의 의견에 따라 동조해버리거나 소수 혹은 피해자의 문제점들 들추어내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이나 자신의 진정한 요구를 간과한 채 사회적 시류나 환경에 맞추어 자기기만을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동조 현상이라고 말한다.


사회 심리학의 역사적 실험 중 Solomon Ache의 동조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여러 명의 가짜 실험 참가자들이 명백하게 오답(각기 다른 크기의 선들 중 예시와 같은 길이의 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주 다른 길이의 선을 정답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말하는 경우, 맨 마지막에 답변하게 되는 진짜 실험자는 오답인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집단의 반응에 “동조”하여 오답을 말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내적 요구나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기보다는 나의 생각도 다수의 의견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적응하는 방법이고 쉽게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를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으며 자기기만이라도 볼 수 있는데, 어떤 용어를 붙이건 간에 실제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내적 요구나 자연스러운 바람을 왜곡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은 첫째, 자신의 내적 요구나 성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둘째, 이러한 내적 요구가 사회적 다수에 의해 인정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셋째, 자신의 내적 요구와 성향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수용한 것이다.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반적 경향과는 다른 '소수'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즉, 쉽게 사회적 인정을 받거나 혹은 큰 이슈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요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내적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 예상되는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불합리한 관행이나 부당한 사회적 이슈에도 침묵하는 이유는 이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은 이런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용기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다.



2.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행동하였다.


자신의 내적인 요구나 성향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내적 요구는 인정했으나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더 큰 내적인 혼란갈증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적 혼란과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함에 따른 결핍과 갈증은 자기기만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과정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이를 충족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 큰 저항과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내적 요구나 성향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기고 억압한 채로 산다. 이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하거나 드러남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차별과 편견을 겪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적 요구나 성향을 제대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과정에서의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과정 상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험난한 단계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었을 때 자신의 진정한 내적 요구와 성향을 만족시키고 행복해질 수 있다.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고 잠재적인 이슈들을 해결해서라도 진정한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용기내어 행동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겪는 두려움과 심리적 어려움에 대해서 '다수'는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유사한 경험을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게, 그러니까 왜 그렇게 살아? 편하게 살면 되지!!'라는 말로 더 상처를 주기도 한다.



3.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소수'는 단지 '소수'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과 서러움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Pier 39라는 바다사자로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그 안에 'Lefty's'라는 작은 가게가 있다. 가게 제목 아래 'THE LEFT HAND STOR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가게에 가면 왼손잡이를 위한 온갖 물품들로 가득 차 있다. 유전적으로 약 95%를 차지하는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잡이용 물건이 따로 있어?'라고 반문하기 쉽다. '다수'인 그들은 세상이 그들의 편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잘 모른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회의노트는 당연하게 왼쪽에 명함이나 펜을 넣을 공간이 있으며 오른쪽에 노트가 위치한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 구조가 왼손잡이에게는 얼마나 불편한지 깨닫지 못한다. 그동안 부지불식간에 오른손잡이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서러움을 느끼던 왼손잡이들은 이 가게에 들어서서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힐링을 받는다.


이런 보이지 않는 편견과 불편함, 그리고 사회적 압력(예전에는 왼손잡이들의 경우 맞아가면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식사하도록 강요받던 시절도 있었음 ㅠ)에 굴복해서 오른손잡이로 살아가도록 한다. 더 거창하게 보면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이나 독재정권 하에서 고통받던 시절, 그 누가 독립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일본군 순사에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길거리 데모에 나갔다가 소위 '닭장차'라고 불리던 전경버스에서의 곤봉맛 좀 보는 순간 민주화고 나발이고 나 먼저 살아야 된다는 비참함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과연 성소수자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해지는 압박과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오른손잡이들과 같은 '다수'나 자기기만을 통해 이미 압력에 굴복하여 내적 요구마저도 부정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일 것이다.


생각보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리고 주변이나 사회적 압력과 협박에 쉽게 굴복한다, 이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일제에 굴하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이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비록 그 성격이나 내용은 다를지라도 성소수자들은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훨씬 더 포괄적이며 일상적이고 집요하다. 그래서 이에 굴하기 쉬우며, 이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런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거의 10년도 넘은 이전에 가장 첫 번째 대중서로 '다름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다름'이라는 것이 '틀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거나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고통받고 있으며, 서로가 '틀림'이라고 비난하면서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하는 현상을 해결하기 싶어서였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며, '다름'을 '틀림'으로 잘못 생각하고 행해왔던 비난을 멈추는 순간 모두가 좀 더 조화와 다양성을 가진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성소수자의 경우에도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다름'을 보이는 사람들이 '소수'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큰 차별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며, '소수자'들도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단지 '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차별받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나 존중받을 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존중은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한 핵심 전제이다. 단지 '다름'과 '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차별과 비난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만약 그와 같은 정당화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소수'가 되는 순간 차별과 그에 따른 고통을 겪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다 보면 스스로도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나 '내가 잘못한 것이네'라는 자괴감과 더불어 자기존중감이 저하되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심리적 상태는 결국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날 용기를 빼앗아 간다.


보석같은 용기를 가진 '소수자'들이 이 글을 읽고 다시금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금 자신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힘을 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다름'이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소수자'라는 것도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다름'을 '틀림'으로 잘못 대하고, '소수자'를 존중하지 않는 '다수자'들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도 스스로에게 솔직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미 "용기가 충분한 자"들이다. '소수자'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던 보석같은 용기를 재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수자'들과는 '다름'을 가진 독특하고 개성있는 자신의 행복을 당당하게 추구하였으면 한다. 그래서 더 큰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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