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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밤 Oct 20. 2019

한국이 싫어서,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느릿한 시선으로 읽는, 책 이야기_람밤로그 

나의 책꽂이에 있는 ‘장강명’이라는 세 글자는 총 세 번 반복되는데 이 글자들이 내게로 온 경로는 꽤 독특하다.



“읽고 네 생각이 나서,”

누군가가 나를 떠올렸다며 내게 건네준 책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였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주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이 싫은 것은 아닌데. 나를 잘 안다고 나와 그 모두가 자부하는 관계의 친구가 나를 떠올리고 책을 선물해 준 것이 참 고마우면서도 하필이면 이런 제목이라니. 

사실 서점에서 자주 보았던 책이고 베스트셀러의 자리에도 몇 번 앉혀져 있는 모습을 보았으나, 심지어 제목이 무척이나 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저리를 서성거렸을 뿐 책을 열어보지 못한 이유는 그 책을 구입하는 순간 내가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였다. 물론 그 책을 사는 사람이 한국을 싫어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여행을 자주 다니고 특히나 서쪽 나라로 여행을 자주 떠났던 나는 '과연 난 정말 한국을 싫어하는 것일까, 막연한 사대주의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일까' 하는 자조적인 의문에 빠져있던 터라 더욱이. 마치 그 책을 사면 나 스스로 내가 우려하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나를 그런 사람으로 판단해버릴 것 같았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작년, 인스타그램에서 진행되었던 ‘책 교환 프로젝트’를 통해 받았던 책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사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주는 프로젝트. 그리고 나 또한 내가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책을 받는 그런 프로젝트. 책을 선물하고 선물 받은 적은 꽤 있었으나 이렇게 서로 모르는 누군가에게 책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기에 설레 하며 책을 기다렸었더랬다. 그리고는 이 경험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은 듯 내가 스스로 살 법한 이야기는 아닌 책을 받아, 무척이나 호기심 가득한 채로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우연히도 장강명 작가의 책은 날 아주 잘 아는 이와 아예 모르는 이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친구로부터 장강명의 책을 받아 들며 ‘장강명’ 작가의 이름을 인식한 그 순간 책꽂이에 꽂혀있던 작년에 이름도 모를 누군가로부터 받은 그 책의 작가 또한 장강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또 하나가 남아있었다. 


인문학 잡지의 존재를 알게 된 때 그들 중 가장 유명하고 알려진 ‘Axt’에 대해 알게 되었을 무렵 가장 최신 호를 사게 되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한 인터뷰의 주인공이자 표지를 장식한 인물 또한 장강명이었던 것. 이 또한 장강명이라는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겪게 된 일… 이쯤 되니 나의 책꽂이에 세권이나 꽂혀있는 그가 궁금해져 한번 더 그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책꽂이로 찾아온 그의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과 이유 모를 예의를 차리게 되었달까.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에서 사는 청년이라면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풀어놓는다. 한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 호주로 이민을 떠난 젊은 여자의 이야기. 뭐 대단한 사연을 가진 누군가의 이야기도 아니고 진짜 평범한 누군가의 이야기다. 

주인공 계나의 한국에서의 삶과 호주에서의 삶 모두 그리 특별하지 않다. 호주에 가서 뭐 대단한 백인과 사랑에 빠지지도 않고 대단한 기업에 들어가 돈을 어마 무시하게 버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곳은 호주일 뿐 사실 한국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어찌 보면 한국보다 못하기도 하다. 한국에서 사귀던 남자친구에 비하면 여러 방면으로 못난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회사다운 회사를 다녔지만 호주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도 하며. 

하지만 그곳이 호주라는 그 사실이 그 모든 일들의 전부였다. 호주에서 계나가 겪는 일은 대부분 별 볼 일 없지만 그곳이 호주라는 이유로 고조되는 감정의 변화를 수반했고 그 일들이 일어났다. 




교차로에 서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네 방향으로 뻗은 길 어느 곳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야. 좀 당혹스럽기도 하고 해방감이 들기도 하고, 뭐랄까, 설렘, 고독감, 쓸쓸함 같은 감정들이 막 뒤섞여서 들더라. 네 방향으로 뻗은 길 끝이 무슨 그림 같아. 파란 하늘에 닿아 있어. 길이랑 하늘이 닿은 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여긴 한국인이 너무 많았어요.”


흔히 발견하는 여행지 후기 중 하나다. 물론 반가움의 뉘앙스는 아니다. 

여행지에서는 줄곧 한국사람을 피하게 된다. 입맛에 맞는 것은 한국인들이 인증한 맛집임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숨겨진 맛집을 찾고 싶어 하고, 심지어 여행지에서 길을 가다 한국인 무리들을 만나면 눈을 찌푸리기까지 한다. 왜일까. 


한국이 현실인 이상 한국은 늘 애증의 공간이다. 현실의 기반이 되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마주함은 곧 현실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기에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여행이 즐겁고 행복한 이유는 누군가가 말했듯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떠나 새로운 곳을 마주하는 것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현실을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새로운 곳에 대해 얼마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느냐에 따라 그들의 비율은 적당히 왔다 갔다를 할 테지만. 나의 터전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곳에 잠시 방문하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두려움보다는 설렘의 감정이 더 크게 오겠지. 

여행은 정말이지 단순히 여행이기에 즐거운 것이다. 내 삶을 잠깐 떠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돌아갈 나의 곳이 있기 때문에 여행은 막연한 기대와 즐거움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쉽게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터전을 옮기는 일에서 새로운 곳을 마주하는 것은 두려움의 크기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테다. 모든 것이 변화를 겪기에. 

책에서 계나가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호주로 떠나고자 하는 이유는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삶이기에 보이는 사소한 문제는 때로는 모든 문제가 되기도 하고, 여행이었다면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을 일이 일상이기에 삶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은 어느 곳에서 사람 사이에 꽉 끼어 있었던 그 잠깐의 사건은 내가 사는 한국에서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계나가 아빠에게 빌려주기로 약속했던 2000만 원이라는 돈을 가지고 호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은 책에 나온 계나의 삶 이후의 시간대이다. 정말로 그 현실이 우리나라이기에 문제였던 것일까. 삶의 터전을 옮긴 현실의 삶은 꽤 괜찮은 삶이 분명한 것일까 하는 것들. 

‘과연 계나는 먹고사는 데 급급한 생존을 존재하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한편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 현실에 대해 독특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자위와 왜곡된 기억으로 만드는 자신의 세계들. 지극히 뻔하고도 구질구질한 현실을 특별하게끔 만드는 패턴으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들.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가해자를 칼로 찔러 죽인 피해자, 그 칼로 찌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학교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였으나 살인사건에서는 피해자가 된 자의 어머니, 마지막으로 우주 알. 이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곳곳에서는 서로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그를 꽁꽁 싸매 없애보려는 그 자기 위로의 순간마저 아주 구질구질하게 보인다. 이 작품이 어느 상을 받았건, 어떤 문체를 사용했건,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건 간에 내게 가장 다가온 작품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아빠와 비슷한 나이대의 성별이라는 이유로 아저씨들을 보면 찔러 죽이고 싶어 하며 그의 아버지를 싫어했던 여자가 자신의 엄마를 보며 ‘아빠가 엄마한테 왜 그랬는지 알 것만 같아’ 라고 한다거나. 

여자가 결정한 것이라고는 없이 강제적으로 부여된 많은 요소들이 그녀의 삶에 영향력을 미친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부모, 그런 부모를 원망하고 혐오하지만 또 그에 슬퍼하고 결국은 그들을 닮아가는 그녀의 모습. 비단 이것이 여자와 그의 부모 그 두 세대의 문제가 아닌 계속된 세대 간의 문제일 것이기에, 나아질 수 없어 분노하고 슬퍼하며 답습될 그 상황이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동시에 어딘가 익숙해서. 


‘그리고 너희 가족 이야기 좀 그만해. 술만 마시면 맨날 우리 아빠 어떤 사람인지 알지, 나 정말 많이 힘들었어, 그 타령. 내가 힘들다, 야. 내 생각에는 너희 가족들도 그렇게 너 냉대하지 않았어. 따뜻한 말도 여러 번 했을 거야. 네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 그렇지.’


-마지막에 아버지랑 딸이 꼭 만나야 하는 거야?
-만나야지.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이런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면 좀 곤란하잖아.
-하지만 생각해봐 그 아버지와 딸은 서로 못 본 채로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나는 건 겨우 십 분 정도야. 그 십 분으로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는 거야?
-그런가?
-저 딸이 만약에 아버지가 오기 한 시간쯤 전에 죽었다면 말이야. 그러면 저 아버지와 딸은 엄청나게 불행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산 셈이 되는 건가? 운이 좋아서 딸이 죽기 전에 딱 십 분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수십 년의 인생에 갑자기 의미가 생기는 거고? …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시공간 연속체에서 살아가는 우주 알이 없는 우리는 그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살아가고, 이에 시작과 끝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현실을 살아간다. 끝이 아름다워야 그 과정의 기억도 아름답게 왜곡되는 시간 연속체 속의 우리. 하지만 정말일까? 끝이 아름답지 않아 그간 잊어버린 채 살아온 많은 시간들이 정말 의미가 없었을까? 






‘Axt’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와 <그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전에는 저는 주로 사람의 내면보다는 사람과 세계가 관계를 맺는 방식, 어떤 시스템이 인물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쓴 것 같아요.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떠나는 사람에 대해 쓸 때 제가 주로 보여주고 싶은 건 그 인물이 얼마나 힘들어하는가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얼마나 힘든 곳인가였던 거죠. 자석으로 철가루를 움직일 때 철가루 하나하나의 내면보다는 철가루 모두에 적용되는 자기장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철가루의 내면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그믐>에서 다뤄봤어요.”


소설의 장점은, 특히나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쓰는 소설의 장점은 이런 곳에 있는 것 같다. 지극한 개인의 낱낱을 파헤치면서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들을 한데 묶어주는 이야기.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디 한켠은 꼭 나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환경은 직접적으로 건 비유적으로 건 내가 처한, 혹은 처했던, 처할만한 상황을 그려낸다. 



‘나’로 태어나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 짙은 외로움이 찾아온 나에게 ‘개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사회’를 말하는 장강명이 세 개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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