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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YES Jun 30. 2019

6개월을 쉬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변화들

20년을 외국계 기업에서 일했습니다. 그중 5년은 한국 대표를 경험했습니다. 회사를 여러 번 옮기면서도 1주일 쉬면서 가족여행 다녀온 게 전부였던 제가 지난 1월부터 6개월을 쉬었습니다. 아니, 무엇인가 매일 바쁘게 살면서 쉬지는 않았지만 매일 갈 직장이 없는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지난 6개월이라는 시간은 계속 직장에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경험과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게 되어 지난 6개월이라는 시간이 저에게 준 선물을 정리해봅니다.

한 달을 아이들과 말레이시아에서 살았습니다. 아이 엄마 없이 한 생활이라서, 길진 않지만 요리와 살림 등 주부의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항상 들르는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계획은, '점심에 뭐 해 먹지?', '돼지고기를 사야 하나?', '워터 필터 사야 하는데..' 등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험을 하기도 했죠. 육아라기보다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뒹굴거리며 놀고 매일 수영을 하고, 함께 요리를 하고 준비하고 치우고, 영어 문장을 외우고, 같이 자기도 했죠. 나중에 은퇴 후에 그럴 시간이 다시 생긴다 해도 아이들은 훌쩍 커서 제 품을 떠나 날아갈 테니깐 다시없을 경험을 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 한 달 살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결국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간 머릿속에 있었던 조각들을 글로 풀어내려 했고, 브런치에 10개가 좀 넘는 글을 썼습니다. 딸 이현이가 삽화를 맡아서 도와줘서 '아빠가 쓰고 딸이 그리는 블로그'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5개 정도의 주제로 외부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직업으로서의 전업 강사의 삶을 잠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사업자를 내고, 도메인을 사고 세금계산서를 발급하면서 오퍼레이션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실무직원들이 도와줬을 법한 일들이라 안 한지 꽤 되었다가 다시 손에 흙을 묻히는 경험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주제가 독특하고 피드백이 괜찮아서 나중에 소일거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몸을 챙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15,000보를 걸으려 했습니다. 분당에서 판교역까지 거의 매일 걸어 다니고 강남 등의 시내에 나가도 2~3 정거장은 그냥 걸어 다녔습니다. 걷기 위해서 사는 것 같은 하정우의 '걷는 남자 하정우'가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도 음악을 들으며 걸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지다가도 또 차분하게 정리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번은 분당에서 대치동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3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다리가 좀 뻐근하긴 해도 할만하더군요. 몸에도 마음에도 모두 좋습니다. 또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되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손목이 좀 아픈 것은 손목이 고정되지 않아서라 하더군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 테니스를 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일상을 잠시 맛보았습니다. 지인 분들께 이런 질문을 드렸었습니다. '은퇴 이후 6개월이 지난 어느 하루의 일상을 상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일과를 묘사해보세요'. 6개월 이후의 일상을 물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나 은퇴 이후의 몇 가지 계획은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가고, 지인을 만나고, 밀린 책을 읽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등의 계획이 있겠죠. 하지만 누구나 일상을 살아갑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들뜬 마음이 식고 일상으로 돌아오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수천억 매출의 기업체 CEO에게 던진 이 질문에 그는 '전혀 생각을 못하겠다. 이 중요한 질문을 던져줘서 고맙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만날 때마다 '김 대표, 계속 생각하고 있어. 느리지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좋아'라고 말씀을 해주시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나태해질 것 같아서 전 알라딘이라는 중고 서점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강의 준비도 하면서 가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서점이니 책을 찾아보기도 수월했죠. 


이렇게 은퇴 이후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다시 맘에 새기기도 했습니다. 일단 생활을 할 돈이 필요하고, 취미도 있어야 하고, 만날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일과 관련이 없어도 만날 그런 지인들 말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시간도 되었습니다. 직장이 없으니 연락을 끊는 지인부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대접을 해주는 지인들도 있었습니다. 
혼자 놀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들은 남과도 잘 어울릴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아주 작게 벌더라도 좋습니다. 누구를 돕는 활동이어도 좋습니다. 보통은 수십 년 동안 배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젊은 친구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파트타임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쓰임새가 있도록 하는 일이 있어야 덜 늙기도 하고, 긍정적인 마음도 잡아주고 사회와 교류를 하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다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매일 출근을 하고 회의를 하고 출장을 다니는 생활의 형태는 비슷하겠지만 이전의 나보다 한 마디 더 성숙해진 마음가짐과 내용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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