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완전 짜증나네요

서로를 세심히 보살피고 위로하는 품위있는 한국어

by Mori

오늘은 말하기 시험을 보는 날이다.

아직 말레이시아에 마땅한 한국어 중등교과서가 없는 탓에 대학생용 기존 교과서의 대화문을 자주 각색해서 사용한다. 오늘 말하기 시험은 짝꿍이랑 같이 기본 대화문으로 역할극을 하는 내용인데 역시나 오늘도 기가 막히게 연습을 해서 나름의 열연을 펼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나의 모국어를 이리 열정을 갖고 공부해 주는 이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넘어 찡한 감동이 느껴진다.

말하기 시험의 대본은 대충 이렇다.


B: ㅇㅇㅇ무슨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요.

A: 아니, 아무 일 없어요.

B: 거짓말, 얼굴에 다 써 있어요. 무슨일 인데요?

A: 사실은 친구와 싸워서 걱정이에요.

B: 왜~ 왜~ 싸웠어요?

A: 그 친구가 글쎄, 내 비밀을 다른 친구에게

말했어요.

B: 어머나, 완전 짜증 나네요.

그 친구랑 놀지 마세요.

A: 아니에요. 그 친구도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B: 우리 기분이 안 좋으니까

같이 초콜릿을 먹으러 갈까요?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보기엔 허술해 보여도 무엇인가 몰랐던 사실을 말할 때 종결어미 ‘~네요’와 이유를 말하는 ‘아서/어서’, ‘걱정이에요’,’ ~지 마세요’, ‘~을 거예요’, ‘면~ 아/어 져요’까지 그동안 배웠던 문법 항목을 나름 꾸역꾸역 넣어서 만든 내 나름의 정수를 쏟아부은 ‘영양 돌 솥 밥’ 같은 지문이었다.

다행히 학생들은 이런 문법 항목들이 숨겨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야무지게 외워와서 암기 시험을 봤다. 특히 완전 ‘짜증 나네’에서 빵 터지는 친구들의 기가 막힌 연기에 ‘까르르까르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삼발챈돌(말레이시아 대표 후식)’로 바꾸거나 극의 리얼리티를 위해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준비성을 발휘하는 녀석들도 있다.


얼마 전 배운 종결어미 ‘~네요’에는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때 사용한다는 친절한 문법 설명이 있다. '정말 춥네요, 진짜 맛있네요, 정말 비싸네요, 진짜 그러네요' 등등 지금까지 수천수만 번을 사용했을 텐데 ‘~네요’ 종결에 ‘이렇게 깊은 뜻이?’ 하고 흠 흠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마냥 학생들에게 설명했었다. 한국어는 정말 말을 끝까지 들어 봐야 그 사람의 속내를 아는 언어다. 춥군요, 춥네요, 춥던데요, 춥겠죠?, 추울까요?, 추운 건가요?, 춥던가요?, 추울지 몰라요 등등

그동안 추워요. 맛있어요, 비싸요 처럼 '아요, 어요, 해요'가 한국어 어미의 전부인 줄 알고 공부하다가 미래 시제 인 ‘ㄹ을 거예요, ㄹ을 게요’가 슬금슬금 나오더니 ‘네요, 져요, 지요’ 등등 3,4 학년 학생들은 요즘 한국어 어미변화의 멘붕에 빠져 있다. 나 역시 한 땀 한 땀 가르치다 멘붕에 빠지긴 마찬가지다.

그나마 '그렇죠? 그렇지요? 그렇지?'는 평소에 내가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라 상대의 동의를 구하거나 의견을 물어볼 때 사용한다는 것을 기똥차게 알아차린다. '그러네요, 맞네요'처럼 뭔가 상대방의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위로하는 표현에 매력을 느꼈는지 요즘 녀석들이 걸핏하면 ‘선생님 그러네요, 맞네요, 괜찮네요’ 하며 나를 위로한다. 종결어미 하나로 상대의 마음을 부드럽게 위로하거나 찰나의 순간 상대의 기분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는 표현에 또 한 번 한국어의 매력이 느껴진다.

'교사는 미래를 어루만지는 사람이에요.'

영화 '교실 안의 야크'에 나오는 대사이다.

애석하게도 너무 보고 싶은 영화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보기가 쉽지가 않아서 ‘언젠가 꼭 봐야지’ 하고 트레일러만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네팔의 오지마을에서 초짜 교사가 억지 부임해 '삶의 깨달음을 얻는 영화'라는데 예고편 영상에 담긴 네팔 소녀들의 미소가 한눈에 '이 영화는 봐야겠군' 마음먹게 한다.

지극히 순수한 무엇인가를 대면할 때 사람들은 무장해제된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마주할 때 극한의 환희가 오가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순간 매일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나의 학생들 얼굴도 떠오르고 '미래를 어루만지다'라는 말에 괜스레 여러 감정이 떠오른다. 나의 오염된 마음은 늘 이 아이들로 정화되니 말이다.


누군가의 ‘미래를 어루만지다'라니 참 아름답고 감사한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학생들을 통해 내 영혼이 어루만짐을 느껴왔기에 교직을 못 떠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마치 투명한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산을 오르다 끝없이 펼쳐진 들꽃 밭을 만난 것 같은 학생들의 깨끗한 미소를 만난 선생들은 아마도 스스로의 직업에서 ‘영혼의 어루만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이 직업은 ‘신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모든 건 다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라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에서 하루키는 말했다.

다 스쳐 지나가는, 지나고 나면 지났는지도 모르는 하루하루의 시간 속 서로에게 오가는 수많은 대화 속에서 오늘도 나와 내 제자들은 '그러네, 맞네, 힘들었겠네' 하며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는 한 마디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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