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맛'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이희승 국어사전'이라는 어른 한 뼘 정도 두께의 국어사전이 있었다. 종이는 앞뒤가 비칠 정도로 습자지처럼 얇고 투명한데 앞뒤로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한, 표지에는 '이희승 국어 대사전'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국어사전이 우리 집에 있던 게 참 미스터리하다.
여하튼 지금처럼 인터넷도 네이버도 없는 시절이라 유일한 놀거리, 볼거리라고는 엄마가 정기 구독해주신 '소년중앙'과 하굣길에 있던 제일은행에 들려 '보물섬'을 읽던 게 문화생활의 전부였던 내게 이 '국어 대사전'은 그 시절의 네이버였고 구글 못지않은 포털이었다. 그래서 심심한 날이면 가끔 배 깔고 누워서 이 책을 성경 읽듯 읽었더랬다. 베고 잠들기에도 딱 안성맞춤이었기에 표지가 너덜너덜해져 어느 해 이사 가는 길에 폐지함으로 종적을 감추었을 때까지 이희승 선생님의 이 국어사전은 내 고마운 한글 선생이었다. 침을 묻혀 가며 찾고 싶은 단어를 하나하나 찾다가 그 언저리에 있는 단어들의 뜻도 어부지리 격으로 알게 되는 즐거움은 요즘같이 정보의 홍수 속에 몰라도 되는 것까지 포털사이트에서 알게 되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런 영향 탓인지 나는 어느 틈엔가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고교시절 ‘텅빈그늘’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주 활동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각 교실 뒷문에 붙여서 친구들에게 알리는 거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마치 ‘유레카’를 외치듯이 이 이희승 국어사전에서 발견한 며느리발톱(새끼발톱 옆 까실하게 난 작은 발톱, 이 역시 젠더이슈가 다분한 단어이지만)이라는 단어를 찾아 친구들에게 소개했던 행복한 기억 탓인지 흔치 않은 이 단어는 아직도 내 말뭉치의 가장 앞줄에 있다.
한국어는 참 아름다운 말이 많다. 감나무에 하나 남은 감을 ‘까치밥’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모르긴 해도 한국밖에 없을 것이며, 이 얼마나 여유 있고 멋스러운 단어인지 감탄하게 된다. 민들레는 정말 민들레 같고, 매듭은 정말 매듭을 짓는 것처럼 단단하게 생겼다. 구름은 정말 구름같이 생겼고 밤이나 별, 빛 같은 한 글자 단어들로 충분히 그 의미를 머금고 있다.
'~을 거예요'를 수업하는 날이었다. 설명을 이어나가다가 '을 거예요'는 내가 마음먹은 일, 결심한 일에 쓰여요.라고 설명을 해주었는데 순간 '마음먹다'는 표현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국사람들은 결심을 하는 걸 마음먹다, 마음먹었어요'라고 해요......"
라고 설명하고 나니 '먹다'가 붙는 표현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사전을 찾아봤다.
먹는 걸 좋아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마음만 먹는 게 아니라 나이도 먹고, 일등도 먹고, 욕도 먹는다. 영어로 하면 ‘get'이나 'take' 같은 '얻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썼을 것 같은데, 왜 한국어는 '먹다'를 썼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아마도 먹는다는 것은 내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라 온전히 내가 되는 느낌 때문에 '먹다'를 썼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자음과 모음이 만나 하나의 음절을 만드는 한국어에는 외국어 학습자를 멘붕에 빠트리는 단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NCT 멤버중 누가 제일 좋아요"
"다 좋아요" "그럼 NCT 127이랑 NCT Dream 중 어디가 더 좋아요?"
'다'는 '모두'의 뜻이고 '더'는 'more'의 뜻인데 모음 하나로 단어가 바뀌는 한국어의 맛을 초급학습자 소녀들은 알기 쉽지 않다. 나와 너, 나무와 너무, 사랑과 사람, 가을과 겨울, 맛있다와 맛없다 등등
매번 선생님을 '손생님'으로 편지에 적어오는 아이들에겐 "뭐 이렇게 헷갈리는 단어가 많지" 싶을 것 같다. 뿐만아니라 한자어와 순수한국어로 구성된 한국어는 단어 하나에 무수히 많은 뜻이 있다. 말하자면 모자도 쓰고, 글씨도 쓰고, ‘사용하다’의미의 쓰다도 있고 ‘맛이 쓰다’도 있다. 또 바꾸다, 교환하다, 교체하다. 참가하다,참석하다 등 모어화자들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한국어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가 아닌 게 참 다행스럽다.
학생들에게 오늘은 노래를 하나 정해서 제일 마음에 드는 단어를 도형 가득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이 아이들에게 어떤 한국어 단어가 콕 마음에 박혀있을지 내심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