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칼바리 시장의 꿀 가게 사장님
빌니우스 오후 2시
서울이라면 한참 바삐 돌아가는 시간이겠지만 좀처럼 해를 마주하기 어려운 이곳에서 오후 2시는 뭔가 해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해야 할 것만 같은 조바심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나마 세, 네 시만 돼도 어둑해졌던 날이 동지 이후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요즘은 그나마 살 것 같다.
오늘도 ‘hey, siri’에게 물어본 날씨는 ‘snowing’
한 달 내내 며칠을 제외하고는 눈이 왔다. 길은 온통 슬러쉬처럼 눈이 녹아 질퍽거리고 눈 반 얼음 반인 길을 걷노라면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을 누군가의 발자국을 조심스레 따라 걷기에도 이젠 지친다. 물론 눈 쌓인 자작나무 숲과 펄펄 날리는 눈송이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십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하는 핸드폰 카메라에라도 넣어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말이다.
“원래 이렇게 눈이 많이 오나요?”
“선생님 빌니우스의 계절은 ‘화이트 윈터’와 ‘그린 윈터’로 나눠요. 아마 부활절까지는 눈이 왔었는데......”
‘뭐라고? 부활절이면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았는데’
'그래 그냥 받아들이자.'
그래서인지 모처럼 해가 나는 날에는 마음이 더 분주하다.
얼른 나가서 햇빛을 몸에 저금해야 할 것같이 마음이 설렌다.
지난 주말 모처럼 해가 났다.
산책도 할 겸 빌니우스의 부엌인 칼바리 시장(Kalvariju turgus:http://www.kalvariju-turgus.lt/)에 갔다. 칼바리라는 지명은 성경의 갈보리를 의미한다. 야채, 생선, 고기 등 식료품부터 옷, 꽃시장까지 뭐든 사고팔 수 있는 곳이다. 사실 빌니우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설 재래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동네 마트가 잘 되어 있는 탓인지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다.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에는 정말 별거 아닌 중고 물건들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비둘기들과 함께 인도까지 영역을 넓혀서 자판을 열고 있다.
갈바리 시장의 상인들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으신데 이분들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폴란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신다. 글쎄 내가 못 알아듣는 이유도 있겠지만 겨우 겨우 얼마예요(Kiek tai kainuoja?키엑 타이 카이누야)와 숫자를 외워서 갔지만 매번 의사소통은 실패다.
꿀을 좀 사려고 꿀을 팔고 계신 할아버지 가게에 들렀다. 베레모로 멋을 내신 주인 할아버지는 외모가 북유럽 동화에 나오는 숲 속 나라 임금님처럼 귀여우시다. 꼼꼼히 오늘 판매일지 같은 것을 적고 계시다가 내가 나타나자 발그레한 볼에 입체적인 미소를 띠시며 인사하신다. 단정하게 쌓아놓은 꿀 병 위에 왠지 프로폴리스일 것만 같은 작은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냐고 묻자 프로폴리스, 프로폴리스 5유로(penki, penki)라고 대답하신다. 옆을 지나가던 러시아 부부인듯한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나를 위해 통역을 해 주신다.
“너 몇 개 살 거냐고 물으시는데?”
“한 개”
손가락으로 숫자 일을 만들어 보여주며 ‘vienas’라고 대답하면서 드디어 의사소통에 성공을 했다.
그 옆 가게 할머니들에게 손으로 짠 양말을 한 켤레를 사고 시장 끝에 있는 야채 시장으로 가 비트도 다섯 개 담았다.
야채 시장 언니는 러시아 사람인지 ‘스바 시바’하고 인사한다.
말레이시아만 인종의 melting pot인 줄 알았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군.......
재래시장은 오후 한, 두시면 문을 닫는다. 서둘러 입구 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주황색 액체가 담긴 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사람들이 자주 마시는 솔타랑키스 아르바타(Šaltalankis arbata)
한국어로는 산자나무, 비타민 나무라고 한다던데 어느 커피집이나 식당에 가도 베리류차에 항상 등장하는 차이다.
한국사람들이 대추차나 인삼차 마시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의 민간요법인 것 같아 요즘 즐겨 마시고 있다.
맛은 산초 향 같은 독특한 향이 있는데 새콤 달콤하다. 추운 날 이 차를 꿀과 함께 타서 눈 오는 바깥 풍경과 함께 마시고 있으면 제법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느낌이 난다.
집에 돌아와 비트를 다듬는다.
비트는 정말 어쩜 이런 야채가 있지 싶을 정도로 자주색이 어마어마하다. 리투아니아식 식사를 시키면 항상 샐러드 삼총사가 등장하는데 비트, 당근, 양배추가 그 아이들이다. ‘무슨 효능이 있길래 이걸 이렇게 부지런히 먹지’를 생각하기 전에 일단은 먹고 있다. 맛은 달큼한 고구마와 무를 섞어 놓은 맛 같다. 말레이시아에서 즐겨 먹던 순무(turnip)가 생각나는 맛이다. 비트는 리투아니아 전통 수프인 핑크스프(Šaltibarščiai(Cold Beet Soup))의 주 재료이기도 해서 이 야채를 대할 때마다 감자와 함께 리투아니아의 기억을 지배하는 주인공이 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말레이시아를 생각하면 두리안과 지겹도록 먹었던 망고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매일 아침 바나나, 요구르트와 함께 갈아서 아침식사로 먹고 있는데 맛도 색도 너무 매력적이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힌다는 것은 잠시나마 나그네처럼 머무르는 자에게는 선택과목이 아닌 전공필수를 이수하는 것처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니고 3인칭 관찰자 시점도 아니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되어서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언어이자 문화이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낯선 이방인에게 신기하고 매력적인 이곳의 언어와 문화가 짝사랑을 가능케 해 줘서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