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이트커피 Feb 21. 2024

세한의 시간

추사 김정희, 세한도, 인생 2회 차


아직 우리나라 지리를 잘 모를 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꼈던 초등학교 시절에,

서포 김만중이 남해로 유배를 와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다고 배웠다.

어린 마음에 내가 사는 곳 남해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남해는 우리나라 아주 남쪽에 있는 섬이며, 임금에게 버려진 사람이 오는 외진 곳이라는 것을. 유배라는 말이 긍정의 뜻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그렇게 외진 곳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지금이야 남해대교, 노량대교가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배로 다녀야 하는 섬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유배를 오지. 이 갇힌 섬에서, 바다만 바라보며 할 일이 무어 있었겠는가, 날 버린 임금을 그리워하며 글을 썼을 테고, '유배'라는 극한의 고독한 상황과 외로움이 문학, 서예, 그림과 같은 예술적 승화를 이루어 냈을 것이다.


인생 2회 차를 생각하니 살아온 날들에 왠지 모를 피해의식을 느꼈다.

꿈을 좇아 잘 살던 내가 '결혼'으로 인해 '나'로 살지 못했고,

나무꾼이 애 셋을 낳게 하고 선녀옷을 감추어 하늘로 못 날아가게 했듯,

아들, 딸 낳고 나니 나도 다시 달릴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답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를 생각하며 '자발적 유배'를 제주로 오고 나니,

역시 유배지의 갑 중의 갑은 제주인가 싶다. 우리나라 최남단 아닌가.


서귀포시 대정읍을 걷다 보면 제주추사관이 나온다.

추사체를 본 기억은 가물하나 주입식 교육의 장점인지 추사 하면 척하고 김정희선생은 절대 잊지 않았다.

추사는 이곳 제주에서 9년 정도의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 머물며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네이버지식백과) 

 형벌을 받았다.



제주까지 유배 보낸 것도 모자라 집안에만 거하게 하는 벌을 내렸으니 추사의 외로움과 서러움은 얼마나 깊었을까? 이런 그를 잊지 않고 함께 해준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에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이다. 이상적은 지금으로 하면 통역관이었고, 북경을 다녀오면서 스승인 추사를 위해 두 권의 귀한 책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이상적에게 보내는 편지글에 다음의 논어문구를 인용해 넣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論語 子罕)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논어 자한)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외딴 초가집 양옆에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려 넣은 한가한 시골풍경,

많은 기교가 담긴 것이 아니고 담백하게 그려낸 나무와 집에서

당시의 추사의 심경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한여름의 숲 속 나무들은 모두 푸르다. 그래서 큰 차이가 없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잎이 바래고 결국은 하나 둘 떨어지지만 소나무·잣나무는 늘 푸른 잎으로 한결같은 자태를 유지한다. 힘든 시기에도 변함없는 마음을 간직한 사람을 이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어려운 일 겪어보면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안다고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유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통과하는 세한의 시간들이 있다. 나에게는 치열하게 살았던 이십 대를 지나 결혼하면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연년생의 두 아이 출산과 학업중단으로 우울증 인지도 모르고 겪었던 우울의 시간들이 인생의 겨울을 지나는 시기였다. 가장 행복했어야 할 시간이었음에도 혼자였기에 더 추웠던 시기였다. 추사에게 이상적이 있었듯, 그 외로움을 공감해 주는 단 한 명의 벗이라도 있었다면 충분히 위로가 되었을 터인데. 심지어는 남편도 제 할 일 하느라 우리는 소통의 시옷도 못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추사의 이상적이 없었듯, 나는 또 세한을 지나는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이상적 같은 벗이 되어준 적이 있나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겨울을 건너는 법은 다르지만, 힘든 시절 내 이야기 들어주는 소나무 같이 변함없는 벗 하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추사관을 나오니 위리안치했던 그의 집이 보인다. 추사관을 돌아 나와 오른쪽으로 향해 안덕면 사계리로 가면 추사가 유배 와서 머무르는 동안 후학을 양성했던 대정향교가 있다. 그곳을 품고 있는 조그만 오름, 단산이 있다 하여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걷듯 단산으로 향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