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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Feb 14. 2024

바람이 지나는 길

돌담 제주 쉼

큰 것은 잘 양보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가끔 생채기를 낸다.

잘 챙긴다고 했는데 그래도 한달살이라 빠진 짐들이 더러 있었다.

남편의 바람막이 점퍼가 그중 하나였다.


내일모레 제주로 오는 딸에게 엄마가 깜박했으니 들고 와 달라고 하는데 찾질 못한다.

못 찾을 수 있지. 옷도 많은데 굳이 그 점퍼를 입겠다고 하는 남편이 마뜩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얄밉다.


“아우, 자기야 그걸 꼭 입어야 ?”


“응, 바람막이가 제주에선 꼭 필요해.”


“다른 옷도 많잖아...”


“바람불 때는 그 옷이 딱이야.”


고집 세다. 이런 태도는 아이 같다.


'그렇게 중요한 옷을 스스로 챙기지 왜 나한테 맡겼냐고',


'그 옷이 꼭 입고 싶었으면 본인이 한번 더 확인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이 완벽할 수 없잖아, 뭐 하나쯤은 잊어먹을 수도 있지 않나ㅠ.'


온갖 자잘한 생각들로 마음은 불구덩이가 되어 타오른다.

으르렁 직전이다.

이렇게 사소한 걸로 감정이 상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도 하기 싫어진다.

작은 일인데, 실망은 배로 커지니 참으로 이상하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참 많이 걷는다. 걷다 보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 애월 구엄리 길가로 핀 풀들이 바닷바람에 살랑살랑 애교 피는 모습을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어찌 볼 수 있겠는가. 주변을 보면서 걷다 보니 아까부터 나와 같이 걷고 있는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정겹다.


하나같이 못생긴 돌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어떻게 포개지고 어떻게 서로 옆자리를 내어줬는지 신기하다. 그렇게 서로 만나 튼튼한 돌담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들로 대충 올린 듯한데 제주의 바람을 견뎌내는 것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제주의 돌담은 가까이서 보면 이가 딱딱 맞아떨어지게 놓인 게 아니다. 돌과 돌 사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바람을 막는 목적이 아니라 거센 바람이 지나가게 하는 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지혜에 감탄을 했다. 바람을 막으려고 돌을 깎아 벽돌처럼 딱딱 맞추어 끼웠다면 작은 바람은 막을 수 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큰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벽이 무너졌을 터이다.


하늘에서 이 돌담을 보면 현무암의 검은 돌이 연결된 모양이 흑룡을 닮은 듯 보인다고 한다. 수천번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돌담. 이런 제주의 돌담을 연결하면 22,108km가 족히 된다고 한다. 지구 둘레가 약 40,000km니까 지구 반바퀴를 돌고도 남는 길이다. 검은색 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고 하여 '흑룡만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흑룡만리라는 이름처럼 오랜 시간을 견디고 관통하여 제주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낸 시간예술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이해하고 거스르지 않으며 생활속에서 잘 적용하였다. 밭에 쌓은 밭담, 사방으로 빙 둘러쌓아 놓은 엔담, 소나 말을 산에 풀어놓고 키우기 때문에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산담, 파도를 치면서 들어오는 바다의 썰물과 밀물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쌓아놓은 원담 또는 갯담도 있다.


골목 밖에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 쌓은 '울담'도 있는데 올래의 돌담을 뜻한다고 한다. 담을 쌓아 개인소유의 영역 구분을 짓기도 하였지만 생활의 편리를 위해 산과 바다에 제주의 돌들을 이용한 것이다.


'돌담'이야말로 제주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의 이야기가 쌓여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제주인들의 생활이 워낙 돌담과 관련 있다 보니


'울담에서 태어나 밭담에서 살다가 산담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평소처럼 걷다가 구엄리의 돌담들을 애써 손으로 만져본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남편과 나라는 돌 사이에도 바람이 지나갈 구멍 몇 개는 필요할 듯하다.


바람처럼 그렇게 비우고, 또 흘려보내며 살아라고 돌담이 내게 웃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끓어오르던 마음에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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