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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Feb 07. 2024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건축학개론, 제주 위미리, 첫사랑

한적한 올레길 5코스를 걷다 보니 제주 남쪽 지방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한가득 품은 마을을 만났다.

바다를 바라보고 걷는 곳마다 정겨운 돌담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 이름도 참 예쁘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제주도의 동백나무 군락지로는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과 남흥 신흥리, 위미리 세 곳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겨울이 아니라 동백은 보지 못했다.

제주 남쪽 파란 바다 그리고 따뜻한 햇볕에 붉은 동백이 피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걸었다.

조용한 해변 길을 걸어가다 아담한 집이 눈에 띄었다.

바다를 품고 있는 넓은 통창에 지붕에도 파릇파릇 잔디가 심긴 다른 제주집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문이 열려있고 입구에 문패가 걸려있다.


'서연네 집'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첫사랑 서연을 위해 지은 바로 그 집이었다.

건축학개론은 재미있게 본 영화라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었는데, 서귀포 위미마을에서 조우하게 될 줄 몰랐다.

첫사랑을 재회하는 마음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마음에 들었던 통유리창이 폴딩도어로 되어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은 창을 활짝 열어두면 서귀포 바다가 통째로 밀려들어 올 것만 같다.


영화의 시작은 삼십 대의 승민이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려 건축가가 되어있고 일에 찌들어 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런 그에게 15년 전 첫사랑 서연이 나타난다.

아픈 아버지와 제주도에서 함께 살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며 부탁한다.


스무 살의 첫사랑을 시작하는 승민과 서연, 그리고 30대가 된 그들의 삶이 오가며 보여진다.


첫 만남은 15년 전 대학 캠퍼스 건축학개론이라는 수업에서였다.

건축학도와 교양과목으로 그 과목을 듣게 되는 음대생 서연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다.


지금 자기가 사는 동네를 여행을 해보세요.  
평소에 그냥 무심코 지나치던 동네 골목들, 길들, 건물들 이런 걸 한번 자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보세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게 바로 건축학 개론의 시작입니다.


건축학개론 수업 중 교수의 말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건축의 시작도 이러하겠지만 사람과의 관계, 연애의 시작도 이러하지 않을까.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연애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승민과 서연은 건축학개론 수업의 과제를 같이 하며 풋풋한 설렘을 시작한다. 20대의 서연을 연기한 수지가 국민 첫사랑이 된 건 이 풋풋함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가 특별히 더 가슴에 와닿은 것은 전람회, 김동률의 음악도 한몫을 했다.

건축학 개론 숙제하러 갔다가 우연히 옥상 건물에서 둘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같이 듣는다.

그때 나오는 음악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다.

지하철에서, 또는 카페에서 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따로 앉았지만 이어폰하나로 같은 음악을 들으며 연결되던 세계.

사랑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서연의 집이 지어지면서 승민과 서연이 서로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해 가는 과정도 함께 한다.

승민은 서연의 살았던 제주집을 살펴보며 예전의 서연을 더욱 이해하게 되고 그 흔적들을 보존하면서 서연을 위한 새로운 집을 만들어낸다.

음대를 다니던 서연이 꿈을 포기한 채 살다가 제주도의 집에서 다시 피아노를 치겠다고 하는 장면에서 살아보려는 서연의 마음이 느껴졌다.

묵었던 과거의 감정을 해소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이었기에 진정 첫사랑으로 의미가 있었지 싶다.  


철없고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었던 그 시절 만난 너로 인해 내 초라한 모습을 더 확인하게 되는 가난한 그때.

그래서 누군가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했었나 보다.

혼자만의 첫사랑인 줄 알았는데 영화의 끝에 가서 서로의 첫사랑이었음을 확인한다.

이십 대의 승민이는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이 커서 서연이 보내는 시그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마 우리 대부분이 그 때에는 이게 무슨 시그널인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니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는 거지.


건축학개론 영화에서의 서연네 집은 영화 이후 카페가 되었다.


서연네 집 카페의 시그니처라는 청귤 차를 시켰다. 서연이 앉았던 통유리창을 통해 서귀포 바다를 보며 한참동안이나 시간을 보냈다. 센스 있는 카페주인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틀어주셨다.


영화를 볼 때는 그냥 들었던 '기억의 습작'이란 단어가 갑자기 마음에 와닿는다.


습작이란 예술작품(소설, 시, 그림)등을 표현할 때 사용할 기법, 작법을 익히려고 연습하기 위해 만든 연습용 작품을 의미한다. 아무리 예술 분야의 장인이라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습작으로 연습하여 더 정교하게 최종 작품을 만들어낸다. (나무위키)


 영화 말미에 미국으로 떠나던 승민이 결국 서연에게 기억의 습작이라는 씨디를 다시 돌려보낸다. 이 기억의 습작이라는 음악을 통하여 사랑의 연습을 의미한 건 아닐까. 우리는 사랑도 습작을 통해 완성한다. 그래서 첫사랑은 초고였다. 그러니 엉망일수도.


서연: 집 짓길 잘한 것 같아.
너 옛날에 약속했었잖아. 집 지어준다고, 기억 안 나?
말해봐 너 그때 왜 나한테 잘해줬었어?
 
승민: 널 좋아했었으니까.
 
서연: 고백이야? 오래도 걸렸네.
 
승민: 알고 있었어?
 
서연: 내가 바보냐 그걸 몰랐을까?
나 자고 있을 때 나한테 키스도 했었잖아.
그거 내 첫 키스였는데.
 
승민: 이제 와서 굳이 왜 나한테, 집 지어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서연: 궁금해서, 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지금은 어떤지 궁금했어
 
승민: 그게 다야?

서연: 나는 네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건축학개론 대사중에서


차를 마시며 승민이 활짝 열어주었던 통창을 통해 한참 동안 서귀포 바다를 보았다.  

현무암이 널려있는 바다는 검푸다.

그 바다를 보고 있으니 오버랩되는 한 장면.


영화 속에서 서연은 마침내 자유로운 표정으로 이층의 잔디를 맨발로 밟으며 서귀포 바다의 해 지는 모습을 보며 걸었다.

자유로워 보였다.

이제는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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