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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Feb 28. 2024

중요한 건 끝까지 꺾이지 않는 馬음

렛츠런파크 제주, 경마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제주는 말을 방목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일 게다.

제주의 중산간 지역을 지나다 보면 말들을 방목해 놓은 농장이 여럿 보인다. 드넓은 초원에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편안한 마음이 든다.


마침 제주에 경마장이 있다고 해서 렛츠런파크 앱을 다운로드하였다. 첫 입장은 무료라고 해서 남편과 주말에 가보기로 했다. 여태껏 영화를 통해 본 경마장의 이미지는 짙은 담배 연기 드리운 심각한 도박중독자의 갈등하는 모습들, 잃어버린 돈으로 낙심한 사람들, 달리는 말에 도파민 과잉으로 흥분한 사람들이 연상된다.

제주 렛츠런파크는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이름처럼 달리고 싶은 공원의 모습이었다.

데이트 온 청년커플들도 보였고,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의 입장객들이 간단한 놀이기구등을 타는 모습도 보였다. 젊은 층이 꽤 보여 놀랐다. 입구에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경마장에 널브러진 예상마 전단지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시는 분들, 불안한 눈빛의 어르신도 보인다.


하루이틀이 아닌 듯 보이는 열성고객들은 고시라도 준비하는 학생처럼 경주마의 정보가 담긴 듯한 신문종이를 끼고 바삐 다닌다. 열심히 공부하고 사인펜으로 줄을 치고 꼼꼼히 메모를 하며 모니터를 예의 주시한다. 비밀이 새어 나갈까 옆사람과 말도 잘 섞지 않는다. 매 라운드 말들이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는 순간엔 자신의 말들을 위해 아낌없는 함성을 지르는 모양이 마치 시위대의 고함소리처럼 커졌다. 격려와 함성 속엔 욕설과 저주 또한 난무했다. 승부가 갈리고 돈이 오가는 이런 곳에서도 인생이 그러하듯 희와 비는 극명하게 갈리고 한숨과 환희도 공존했다. 그 와중에도 제주 하늘은 왜 이렇게 맑은 것인지.


남편과 나도 팅을 해보기로 했다. 출전하는 말들의 종류를 보고 팅할 말을 정해야 하건만 둘 다 처음 와보니 마음 가는 데로 번호를 골랐다. 아까 정보지를 잔뜩 옆구리에 끼고 가던 아저씨에게 어떤 말이 괜찮은지 넌지시 들어라도 볼 걸.

재미로, 그냥 경험 삼아 한 번 다고 해 놓고는 겨우 만원 베팅하면서도 생각은 끝없이 많다.


지를 넣고 나서야 오늘 출전할 말들을 구경했다. 출전하는 말들의 상태를 보고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말에 팅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한 것이다. 처음 해보니 두서없이 내 맘대로다.


경마를 팅하기 전 말들이 사람들 앞에서 한 바퀴 돌고 두 바퀴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다. 비슷한 듯 보이나 말들은 모두 달랐다. 엉덩이가 토실하고 다리가 쭉 빠져 잘 달릴 것 같은 놈이 지나간다. 아, 내가 팅한 4번이네. 홍홍 음흉한 웃음이 나온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길이가 2미터나 된다고 한다. 어금니는 있지만 송곳니가 없고 700킬로나 되는 거구지만 초식동물이다.



내 말이 1등은 못해도 남편한테는 이기고 싶다. 어떤 말은 촐랑거리고, 어떤 말은 과묵하게 걷는다. 저 중에 어떤 말이 과연 잘 달릴지 알 수 없다. 기수가 나오자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파이팅을 외치고 기수들도 인사를 한다.

말에 올라타는 기수분들은 대부분 키가 작았다. 속도를 내야 하니 키와 몸무게는 당연히 중요한 조건이다. 실제로 기수의 조건은 키 168센티에 49킬로 라고 한다. 일단 몸무게에서 나는 탈락되겠다.

 

출발신호가 울리자 역시나 내가 고른 4번 말이 선두를 치고 나왔다.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 기가 죽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잘 달리려면 피지컬이 우선이지. 조금만 더, 그렇지 그렇지 달려 달려,

힘내 끝까지, 가보는 거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이제 팅이고 뭐고 그놈이 끝까지 1등 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냥 내가 왠지 그놈한테 빙의가 돼서는 끝까지 잘 달려라 응원했다.

그런데 이 놈이 딴생각을 했는지, 중간에서부터 동력을 잃기 시작하더니 뒤로 밀려났다. 꼴등 하던 남편의 말이 갑자기 치고 나온다.


'이 무슨 드라마 반전이래. 10등, 9등, 어떻게 5등까지 와버렸네.'


오홋, 기가 살아나는 남편, 10m 정도 남겨두고는 남편의 말이 기어이 일등으로 들어와 버렸다. 경마장에서 처음 느껴본 반전의 희열에 아 이래서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꼴등을 하다가 중간에서부터 치고 나와 1등까지 가버렸으니 인생 제대로 반전스토리를 썼다. 주위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이럴 줄 알았다며 좋아하는 사람들,

이게 뭐야, 이렇게 인생이 꼬이냐며 한탄하는 사람들.


안 보고 골랐으니 저렇게 작고 볼품없이 생긴 놈한테 팅을 했다고 남편에게 면박을 주었는데 나도 보기 좋게 당했다.


남편이 한마디 한다.


'인생 후반부터야. 끝까지 가서 웃는 놈이 진짜 이긴 거지.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겠어?'


이건 나한테 하는 말같아 새겨들었다.


그렇게 만원을 팅하고 이만 원을 번 남편은 좋은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사겠다고 잘난 척을 했다.

그렇게 만원을 팅하고 나는 그 돈 다 날렸다. 다 잃고도 처음 해 본 경험 왠지 행복한 나는 끝까지 달려준 멋진 4번 말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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