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누구나 한 번쯤 인생에 위기가 찾아온다. 나는 2013년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글 쓰면서 먹고사는 삶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다 했다. 광고 카피라이터, 독서논술 강사, 취재기자, 사보 기자, 공연기획사 스탭, 게다가 일대일 글쓰기 문학 과외로 지식창업지원금을 받으면 창업센터에 입주하기까지 했다.
창업센터 지원금이 만료되는 2015년 3월쯤 내 마음속에는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글쓰기 과외로 5명 남짓한 사람들과 과외를 하고 있었지만 불규칙한 생활패턴, 불규칙한 외주 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망가져 있었다. 정규직이 아닌 회사 사원증이 없는 삶에 자존감도 바닥인 상태였다.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새벽까지 글을 쓰다가 대낮까지 잠을 자면 그렇게 열패감이 들었다. 그 망한 캐릭터 같은 감정으로 잠에서 깨어나 이불에 그려진 장미꽃 패턴을 보면, 어느 날은 그게 벌 같았다가 어느 날은 그게 또 다른 형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가 나로 서 있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았다. 어떤 결정을 하거나, 아주 작은 문제들이 닥쳐도 내가 기대고 있던 사람들을 탓했다. 사실은 내 탓이거나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거나,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인데도 그런 문제들을 어른스럽게 직면하는 일을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제대로 겪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투덜대면서 두 아이를 키웠다. 어느 날 둘러보니 아무도 더 이상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 것 같았다.
성취감을 어디서 얻어야 할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나다운지 생각하며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살기 위해서 매일 아이들을 키우며 느낀 감정들을 블로그에 적었고, 아이들이 자는 시간이면 털실을 꺼내서 목표했던 뜨개 도안을 이리저리 독학하며 하나씩 완성했다.
하나의 글을 매듭짓는 일.
필요했던 털모자를 사지 않고 스스로 떠서 쓰고 다니는 일은
그 당시 유일하게 내가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웠던 일이었다.
하지만 뜨개를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지다 보니, 그것도 병이 들었다. 저장장애가 온 것이다. 여름철이면 스웨터 공장에서 제조하고 남은 콘사들이 떨이로 중고나라와 동대문 종합상가에 쏟아졌다. 브랜드 털실이 아닌 1킬로에 만원도 안 되는 털실 덩어리들을 싸다는 이유로 야금야금 사모았다. 그렇게 집안에 털실 덩어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야근하고, 혼자 아이들을 일주일 내내 집에 갇혀서 보던 무더운 여름철, 유일하게 택배 아저씨가 우리 집 문에 콘사 박스 선물을 두고 가시니. 그런 달콤한 위안을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콘사를 한가득 가슴에 안을 때, 그 콘사 실타래로 감아 가방에 넣고 다니면 뜰 때마다 행복했다.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 유일하게 털실이라는 사물이 나를 위로했다. 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내 상상력의 샘이었다. 어디에도 풀 수 없는 그 창작욕을 풀며, 수없이 떠내려간 뜨개 작품들은 이제 우리 집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더 실력이 좋아질수록 과거의 뜨개 작품들이 서툴게 보였고, 무겁고 짐스러웠기 때문에 처분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그때 그 작품들을 추억한다.
그토록 사들였던 털실들에 대해서 나는 부끄럽지만 이제는 고백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정신병원 값이었다고. 그 실들을 통해서 나는 내가 미칠 듯이 외롭고,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들 속에서 두 아이를 길러내는 순간, 그 암흑에서 나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했던 지옥의 한 철을 털실과 잘 넘겼다. 물건을 모아야만 되는 마음이 점점 커져서 창고와 방을 전부 털실로 채웠던 것을 다시 하나하나 박스에 담아 중고나라에 팔았다. 그러나 2023년 8월에 예정된 뜨개에서 보낸 한 철 책과 뜨개워크숍 전시를 위해 다시 집안이 콘사로 채워졌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저장장애라는 심리적 문제와 늘 싸우며 내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고, 수납하는 고행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느낀 털실과 저장장애,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를 함께 나누고 싶어 책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