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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Apr 02. 2024

엄마는 그냥 아픈 사람

엄마는 포항에서 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아가씨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재주가 많았고, 법 없이도 살만한 착한 성품을 가졌다.

피아노를 독학했다.

그 시절, 구하기도 힘든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데에는 아마도 어려서부터 다녔던 교회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피아노를 혼자 배워 서울 큰 피아노 학원에 교사로 일을 하고, 주일에는 교회 성가대 반주를 했다.

그 교회에서 아빠를 만났다.


강원도 출신, 제법 잘 생기고 언변도 좋은 아빠를 만나 같은 신앙심을 가지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

속전속결이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아빠가 결혼하면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을 차려주겠노라 프로포즈를 했지 싶다.

아빠 엄마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아빠 이름 한 글자를 딴 피아노 학원을 차렸고, 그때만 해도 있는 집 자식들이나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부유한집 유치원생 국민학생 중학생 자녀들로 북적여, 쌍문동 돈을 쓸어 담았다고 한다,

당시 고졸 여성 경리 월급이 20만원 하던 시대에 한달에 100여만원이 현금으로 들어왔고 아빠는 거의 매일 은행에 저금을 하러 들락거렸다고 한다.

피아노 두 대에서 시작한 학원은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열 대로 늘어났고, 수강생들이 너무 많아 학생들이 몰려오는 시간에 조를 짜서 대기했다가 수업을 듣기까지 했다고 한다,

피아노 학원이 한창 잘 나가던 때 아빠는 군대를 가야 했고, 엄마는 꼬박 3년을 혼자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2주에 한번씩 강원도 부대로 아빠 면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가 제대한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나는 쌍문동 피아노 학원 집 귀하디 귀한 고명 딸이었고, 젊고 돈 잘벌고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부부에게 그 어떤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그 창창한 현실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서서히 무너져갔다.

엄마가 조금씩 이상해진다는 것을 할머니는 눈치 채고 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할머니에게 “아버님이 저희 동네까지 오시고는 저희 집은 들르지도 않고 그냥 가셨어요”라고 말을 하더란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 “너희 시아버지는 촌사람이라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에도 갈 수 없는 사람이고, 거기까지 갔으면 너희집에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네가 잘못 본거다”라고 재차 말했지만 엄마는 고집을 부렸단다.

또 군대 간 아빠 면회를 갔다가 할머니 집에서 자던 어느 날에는 방에 귀신이 있어서 무서워서 못 자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병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마를 덮쳤다기 보다는, 본인도 모르게 주변사람도 알지 못하게 슬금슬금 엄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돌을 지났을 무렵, 아빠는 더이상 피아노 학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엄마의 증상이 갑자기 심해진 것이다.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되질 않고, 어린 나를 케어하는 일은 더더욱 맡길 수가 없었다.

나는 강원도에 계신 할머니 댁에 맡겨졌고, 아빠는 엄마와 함께 쌍문동을 떠났다.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아빠는 피아노 학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런 저런 사업을 시도하다가 잘 되지 않았을테고, 우리는 월계동의 작은 연립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내 어린시절은 여기서부터다.


수차례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맡겨졌던 나는 6살 무렵에 월계동 집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내가 경험했던 엄마의 조현병 증상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6살부터 나에게 엄마는 “그냥 아픈 사람”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건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엄마는 늘 아팠다.

머리가 아팠고, 소화가 잘 안되었고, 사람들이 접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혼자 욕을 했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하루 24시간 내내 엄마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상태가 조금 안 좋다가도, 금새 밥을 차려주고,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다시 누워있다가,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시켜주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월계동 시절의 엄마는 아픈 와중에 나를 케어했고, 집안 살림을 거들 정신이 남아있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와 나를 집에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불안했고, 아빠가 돌아올 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당시 택시 운전을 하던 아빠가 가끔씩 사들고 왔던 노란봉투에 담긴 통닭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다.

7살 1년, 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에서 드림랜드로 소풍을 갔는데, 친구들과 함께 탄 어떤 놀이기구 하나가 무척 재밌었다.

공중에 붕~떠오르는 놀이기구였는데, 아빠에게 한번만 더 그 놀이 기구가 타고 싶다고 얘기를 해서, 아빠 시간이 되는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드림랜드에 갔다.

소풍날과는 다르게 흐리고, 가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다시 그 놀이기구를 타는데 친구들도 없이 나 혼자, 빗방울을 맞으며 다시 타는 그 놀이기구가 하나도 재미가 없고 마음에 쓸쓸함이 밀려왔다.

놀이기구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아빠를 바라보았지만 웃음이 나질 않았다.

40이 넘은 지금도 가끔 그때 그날의 장면과 감정이 떠오른다.

그토록 재밌었던 놀이기구를 다시 탔는데 나는 왜 하나도 신이 나질 않았을까

우울한 하늘이, 예기치 않게 내리는 빗줄기가, 홀로 외롭게 서있는 아빠가, 나는 참 우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7살, 나는 그런 감정들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생각했을 때, 왜 그때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울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신경정신과가 지금처럼 동네에 흔하게 있지도 않았고, 엄마 같은 사람의 병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병원에서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못했다.

그저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소화가 안되면 소화제, 엄마는 약국에서 파는 약에 극도로 집착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다른 해결책은 보이지 않으니, 약국에서 무분별하게 약을 사다 먹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혼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욕을하는 등, 갈수록 심해지는 엄마의 증상에 아빠는 이대로 서울에 우리 끼리 살 수 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이맘때 엄마의 친정, 나의 외가집 식구들은 엄마를 포기했다.

엄마는 7남매 중 다섯째였다.

그렇게나 많은 형제와 자매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를 감당해야 하는 몫은 모두 아빠의 것이었다.


강원도 할머니 품으로 내려간 우리는 서울에 외로이 있을 때보다 조금은 안정되었다.

엄마도 의지할 곳이 있으니 그 증상이 조금 완화되었고,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니 안심하고 밖에 나가 일할 수 있었다.

엄마는 봄이 되면 쑥을 캐 와서 쑥떡을 만들어줬다

지금은 레시피도 생각나지 않는 전자레인지 계란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내 생일 파티를 집에서 성대하게 치뤄주기도 했다,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케잌과 맛있는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산에서 들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가끔 엄마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호가 있었고, 엄마의 증상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현병 환자에게 안정적인 환경이 이래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엄마는, 좁디좁은 서울 반지하 연립에 살 때보다, 건강한 자연환경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과 모여 살 때 증상에 크게 호전을 보였고, 스스로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나는 자다가 크게 놀라며 깨어 엉엉 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른들은 무서운 꿈을 꾸었냐, 괴물을 본 것이냐 물어보셨지만, 어린 나로서는 내가 자다가 놀라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다가 놀라 깨는 증상은 성인이 된 후까지도 이어졌는데, 기억나는 느낌이 하나 있다.

어릴 때 자다 놀라던 그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동일하게, 나는 꿈 속에서 아득하고 공허한 어떤 빈 공간에 서 있고, 무언가가 나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공포를 느끼는 그런 느낌이었다.

무려 20여년을 동일하게 꿈속에서 겪은 느낌이다 보니, 증상이 없어진 지금 다시 꺼내어보아도 생생히 기억나는 느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아주 어린 시절 엄마의 병 때문에 엄마 아빠와 억지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경험이 어린 나에게 그런 생채기를 남긴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는 4학년이 되었고, 대전에서는 엑스포가 한창이던 그 해 여름, 아빠는 엄마의 증상이 조금 완화되어 보이는 것에 힘을 얻어, 더 나은 벌이를 위해 경기도 광명시로 이주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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