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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Apr 08. 2024

엄마 귀에만 들리는 이상한 소리들

광명으로 이사 온 우리는 어느 교회 안의 교육관에 터전을 잡았다.

아빠가 교회 사찰 집사 일을 얻은 것이다.

집을 따로 얻을 돈은 없어, 교회에서 제공한 방에서 삶을 해결해야 했고, 처음 몇 달은 1층 교육관, 그 다음엔 꼭대기 옥탑방에서 살았다,

낯선 곳에서, 그것도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던 탓이었는지, 엄마의 증상은 극도로 심각해졌다.


엄마의 주된 증상은 환청이었다.

후에 의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은 꼭 부정적인 말들을 누군가가 소리치는 형태로 들린다는 것이다,

넌 패배자야!, 넌 할 수 없어!
사람들은 다 널 미워해!


엄마는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나한테 왜 그래요! 나 아니에요!”

그리고 끊임없이 머리 속의 그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화를 내고 소리치고 싸웠다.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며 귀를 틀어막고 소리질렀다,

환청은 망상으로 이어졌다,

‘아무개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지금도 올라와서 우리 집을 엿보고 갔다. 너도 조심해라.’

이해되지 않는 엄마의 말들을 들으며 내 나름대로 엄마를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목소리와 욕지거리였다.

“아빠와 내 사이를 니가 이간질 시키고 있어!!”

엄마는 나를 미워했고, 때렸고, 욕하고 밖으로 내 쫓아 버렸다.


어느 날은 천원짜리 한장을 던져주며 무턱대고 약을 사오라고 밖으로 쫓아냈다.

나는 천원을 들고 울면서 약국을 찾아가 “엄마가 약을 사오래요..”라고 하소연했고, 무슨 약을 줘야할지 난감한 약사 선생님이 이래저래 꾸려준 약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더이상 나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감당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몸도 챙길 수 없었던 엄마의 치아는 썩어들어갔고, 몸은 빼빼 말라만 갔다.

아빠는 바빴고, 나는 하루 한끼 컵라면으로 식사를 떼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숨을 못 쉬겠다고 발작을 일으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응급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주변 환자들은 좀 조용히 하라며 불평을 하였다.

아빠는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의사의 지시를 기다렸다.


내 기억에 그때부터 병원에서 신경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으나, 엄마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를 거부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조현병 환자들에게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설령 치료를 시작하더라도, 약의 부작용이 싫어 약을 몇 번 복용하다가 스스로 치료를 중단해버리는 사례가 많다.


엄마는 치료가 시급한 환자였다.

치료를 받지 않는 엄마를 감당해야 하는 아빠와 나의 고통은 너무 극심했다.

아빠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당시 가까운 신경정신과 병원이 있어 몇 번 약을 타다 먹어보기도 했지만, 엄마가 스스로 중단했다고 한다.

약. 약만 먹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아빠는 열악한 교회 환경을 떠나 옆 동네로 이사했고, 그 곳에서도 엄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집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마음씨 좋은 주인집 할머니가 내려오셔서 “진주엄마 왜그래~ 진주엄마 진정해~” 달래주시기만 하셨고, 우리를 쫓아내지는 않으셨다.


나는 학교에 가면 활발하고 성실한 어린이였지만,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그 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콩닥거렸다.

오늘은 집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엄마는 어쩌고 있을까.

아빠가 퇴근하는 저녁까지 엄마를 상대해야 하는 건 내 몫이었다.

엄마는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그럴 때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나한테 소리지르고 욕했어”라고 말하면 생사람 잡지 말라며 아빠한테 그렇게 이간질 시키지 말라고 나를 혼냈다.

자신의 증상과 발작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활발하고 다양한 활동도 많이 하던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있어야 했다.

다른 친구들 집에는 한 두번씩 놀러가곤 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살림도 초라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엄마가 있는 집에 친구를 초대할 수는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넌지시 궁금해하기도 했다.

“오늘은 너희 집에 가면 안돼?”

미안해, 엄마가 아프셔

거절의 핑계는 매일 뻔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케어하는 아빠는 나의 우주였다.

아빠는 생활력이 아주 강했고, 극한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가정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자상하고 커다란 언덕이 되어 주었다.

엄마의 몫까지 나를 사랑해주었고, 나를 믿어 주었고, 그 길고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가 되어 주었고, 내가 힘들 때 언제든 가서 쉴만한 쉼터가 되어 주었다.

최근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았을 때, 내가 이만큼 건강하게 자라고 더이상 아프지 않고, 이런 가치관과 이런 소망을 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단 한 사람, 아빠의 희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빠는 나에게 최후의 보루였고, 지금의 나와 우리 가정을 만든 숙련된 장인이었다.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아빠라고 해서 왜 방황의 시간이 없었을까

아빠는 얼마나 스스로를 연단해야 했을까

깎이고 또 깎이고, 감내하고 또 감당하고…

나를 보고 소망을 품고, 어려운 현실을 겪어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엄마를 보고 좌절하고, 화도 냈다가, 울어도 봤다가…

아빠라고 그런 시간이 없었을까

이유 없이 날벼락처럼 떨어진 이 불행을 끌어안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삶과 이 가정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때는 없었을까..

인생의 황금기였던 20대와 30대, 40대를 말도 안되는 시련을 겪어가며 흘려보내야 했던 아빠와 엄마의 그 청춘들을 생각하면 사무치게 아프다.


엄마는 환청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면봉을 귓구멍을 피가 나도록 파기도 했고, 휴지를 동그랗게 뭉쳐 귀를 막았다.

스카프로 머리를 싸매고 귀를 틀어막고 누워있었고, 두통약, 변비약, 소화제, 자양강장제, 감기약 등 약국에서 파는 약에 더없이 집착했다.

아빠와 나는 이제는 고정값이 되어 버린 이 일상의 고통에 익숙해지며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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