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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Apr 09. 2024

약을 먹기 시작하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큰 결단을 한다.

엄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신경정신과 의원이 워낙 보편화 되어있다보니 큰 정신병원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가 사는 곳 인근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이 용인에 있었다.


어느 날 엄마의 커다란 발작을 계기로 아빠는 엄마를 그곳에 입원시키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약 한 달 간 그곳에 입원해 있었고, 아빠와 나는 토요일마다 과일을 싸들고 엄마 면회를 갔다.

지금도 아빠와 단둘이 엄마를 보러 광명에서 용인까지 가던 그 길이 생생히 기억난다.

안양을 거쳐 의왕을 거쳐 아빠가 친절하게 여기는 무슨 동네고 여기는 어디라고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엄마를 보러 다녔다.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그 착하디 착하고 여리디 여린 천성으로 일주일동안 그리워한 아빠와 내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의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병을 인지했다.

병원에서 나오면 꼭 약을 열심히 먹어야 한다는 다짐도 했다.

그 한달의 입원 생활이 엄마의 본격적인 치료에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엄마는 퇴원 후, 곧장 병원에서 연계해 준 서울 이수역 인근의 한 신경정신과 의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1997년, 엄마가 약을 먹기 시작했다.

1984년 처음 발병하고 13년 만에,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약은 정확했다.

엄마의 주요 증상이었던 환청은 점점 완화되었다.

엄마는 그것을 ‘와글와글’이라고 표현했는데, 엄마에게는 실제로 여러사람이 와글와글 떠드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와글와글이 좀 사라졌어

엄마의 얼굴에 평안이 찾아왔다.

의사는 엄마에게 가장 맞는 약을 찾기 위해 약을 조절해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약은 엄마에게 잘 들어맞았고, 어떤 약은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어야 했고,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이 약을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명확히 인지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엄마가 매달 이수역까지 가는 것이 어려워 아빠는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병원에 들러 약을 타다줬다.

병을 앓는 동안 엄마가 잃은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몸을 전혀 돌보지 못한 탓에 체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환청에 시달리며, 먹는 것, 자는 것 무엇 하나 수월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을 살았다.

치아는 다 망가졌고, 조금만 무리하면 몸에 적신호가 켜졌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졌다.

엄마가 만나는 사람은 가족 이외에는 전무했고, 그만큼 사회성은 뒤쳐져갔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자신은 나약한 사람, 아픈 사람,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는 패배감이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약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만이 치료의 전부가 아니라고.

그동안 병으로 인해 끊어져버린 세상과의 단절을 극복해내는 것이야 말로 근본적인 치료의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 영역은 의사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 스스로 노력해 내야 하는 부분이었고, 엄마는 미약하게나마 혼자 슈퍼를 가고, 교회에 가서 배려해주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야쿠르트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는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약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여전히 어려운 살림살이에,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엄마를 끌어안고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엄마는 소리지르지 않았고, 욕하지 않았다.

아빠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고, 나도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가고 취직을 했다.

‘우리 있잖아 옛날에 말이지…’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엄마의 사회성 회복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딱 엄마가 할 수 있는 그만큼, 엄마가 용기내어 할 수 있는 만큼 나아갔고, 아빠와 나도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혼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고, 친척의 결혼식 날에는 예쁘게 화장과 머리를 하고 한복을 차려입고 멀쩡하게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넉넉치않은 살림이었지만, 아빠의 성실함 덕분에 나는 대학에 갈 수 있었고, 취직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 했을 때 아빠는 너무 기뻐서 회사의 모든 직원들과 악수를 나눴다고 한다.

너무 입사하고 싶었던 첫 회사의 합격 통지가 나왔을 때, 엄마를 부둥켜 끌어안고 울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좋은 날들이 있었다.

초라했지만, 빛나던 날들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남은 인생에 계획과 꿈이 있었다.

그 어떤 꿈도 꿀 수 없었던 시간을 걸어오다보니, 어느새 꿈을 꿀 수 있는 나 자신을발견 했을 때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감사를 말했다.

세상에 감사한 것 투성이였다.

엄마가 여전히 약을 먹어주는 것이 감사했고, 환청이 사라진 것이 감사했고, 순한 양 같은 엄마가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집을 지키고 있어 주는 것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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