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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21. 2024

헌법으로 가는 길

멀기도 멀다

때늦은 역병을 앓아 며칠 만에 출근했더니 팀장님이 수줍게 종이를 두어 장 내미셨다. ‘헌법 교육’ 안내문이었다. 움찔하면서 팀별 할당이 있는 거냐고 조심스럽게 여쭈니 과장님이 나를 보내는 게 어떠냐고 운을 띄우셨다 했다. 나다 싶으면 하는 게 사회생활의 기본이니 아주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일단 간다고는 하고 일정을 살피니 완주에서 1박 2일로 하는 거였다. 완주? 완주가 어디지? 견훤이 살던 데인가? 거기는 완산주지. 기억을 더듬으니 20여 년도 전에 한국지리에서 나왔던 것도 싶었다. 대충 먼 곳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 자고 와야 하니 딸도 걱정이 되었다. 시간 되는 재하관계자들을 수소문해 보니 다행히 나눠서 돌보면 될 것 같았다. 등원은 엄마가, 하원은 작은 처형이, 다음날 돌봄은 가족들이 다 같이 해주시기로 했다.     



지나다가 과장님을 마주쳤다.

“과장님, 헌법교육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아이는?”

“다들 시간이 되셔서 돌봐주기로 했어요”

“그래. 잘 갔다 와서 다른 사람들한테 헌법이 뭔지 가르쳐야 해. 헌법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알아와”

“그런데 과장님 제가 2년간 합숙하면서 헌법을 되새겼는데 이게 필요할까요?”

“그런 생각을 갖는 게 교육이 이미 필요한 거야. 열심히 해 가서”

“... 네”     



교통편을 살펴보니 답이 없었다. 아침 9시 반까지 가야 해서였다. 버스는 애초에 해당사항이 없었고 기차는 6시 이전 차를 타면 이론상 가능은 한데 별 의미는 없었다. 지하철 첫 차를 타고 가서 수서에 내리면 열차 출발시간이랑 6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 6분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없었다. 육상 선수마냥 달려서 탄다고 쳐도 익산역에서 내려야 했다. 거기서도 완주 지방자치인재개발원까지 직통은 택시 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돌아서 가야 했다. 그럴 바에는 차를 끌고 가는 게 나았다. 간만에 장거리라니 설레었다. 육아휴직 할 때 SRT 타고 출장 다니던 아내에게 비즈니스맨스럽다고, 멋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분은 기차를 나에게 던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셨으니 속죄한 셈 치기로 했다.     



교육 가기 며칠 전부터 피곤했다. 국민에게 봉사하느라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명절 때문도 아니었다. 아이에게 사주었던 게임기가 문제였다. 딸내미가 잠들면 그거 하느라 그랬다. 지난번 의욕만 갖고 1인칭 게임을 하다 멀미했던 걸 기억하고 면밀한 검토를 거쳤다. 물고기를 잡고 양식을 하고 초밥을 만드는 게임을 골랐다. 너무 재밌는 거였다. 참치 한번 잡고 자겠다하다 두 시까지 못 잤다. 미쳤다 정말 미쳤다 스스로 되뇌며 잠자리 들기를 사흘 하니 토할 것 같고 두통이 심했다. 출장 전날에도 그랬다. 어찌어찌 근무를 한 후 집에 오며 반드시 일찍 자리라고 다짐했다. 다음날 재하를 등원시켜야 하는 엄마가 와서 재하와 놀아주었다. 일찍 잘 기회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생선을 잡아서 팔았다. 중간에 재하가 와서 아빠 뭐 하냐고 했다. 할 말이 없어서 자아실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뭐야? 자아시련?”

“... 꿈을 이루는 거야”

“나도 크면 이거 할래!!”     



뱃사람이 되겠다는 재하를 재우고 개가 똥을 못 끊듯 자정 넘어까지 물질을 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내일은 6시에 일어나서 운전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일렀다. 40대가 되니 자제력이 생겼는지 기적적으로 12시 반에 잤다. 대신 일어나는 시간을 20분 정도 늦춰 알람을 맞췄다. 행동을 서두르면 될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어거지로 일어났다. 엄마는 다른 방에서 잤는데 같이 일어나서 이렇게 저렇게 하며 준비를 하라고 참견을 했다. 산불은 맞불로 막아야 한다고 들었다. 잔소리는 더 큰 잔소리로 이겨야 했다. 재하를 데려다줄 때 이리저리 하라고 했다. 엄마는 알아서 잘할 테니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했다. 승리로 아침을 시작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6시 40분쯤 시동을 걸었다. 네비가 2시간 20분쯤 걸린다고 했다. 날이 아직 컴컴하니 발라드 음악을 틀었다. 다른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울부짖었다. 걸그룹 노래로 바꾸고 싶었다. 날씨가 내 직장생활 앞날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해서 딴짓을 할 수 없었다. 그 새벽에 시간이 꽤 걸렸던 것도 곳곳에 사고가 나서였다. 천안에서 논산 가는 길로 들어섰다. 군대 가던 길이었다. 옛 생각이 났다. 내가 입대할 때 동생이 함께 갔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병역을 먼저 치렀다. 한참 전에 전역을 했음에도 논산이 가까워오자 동생은 쇠냄새가 난다며 불안해했었다. 민방위도 끝났지만 ‘연무’라는 글자가 계속 눈에 띄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맛있는 걸로 군대 망령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샀다. 바로 만든 거라 뜨거워서 한 입 물다 팥을 뿜었다. 윗도리, 아랫도리, 겉옷 모두에 검붉은 게 묻었다. 훈련소 옆이라 동티가 났다 보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맛있어서 다 먹었다. 호두과자로 퇴마를 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서둘러야 했다.     



논산에서 완주까지 가는 길들은 구간 단속 지역이라 차들 속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제야 속도를 좀 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도 그럴 수 없었다. 9시 반까지는 와달라고 했는데 24분에 개발원에 들어섰다. 정문에서 안내해 준 주차장에 가니 차량이 천 대쯤 있는 것 같았다. 차 대는 것도 쉽지 않아 헌법 교육보다 주차교육을 먼저 받나 싶었다. 어찌어찌해서 교육장소로 가니 사람들이 거의 다 와있었다. 원탁 여러 개를 배치해서 교육생들을 앉혔다. 안타깝게도 앞자리밖에 자리가 없었다. 거기 앉은 분들은 늦게 온 죄들을 지었기 때문에 표정들이 안 좋았다. MT 가는 것 마냥 후드티 입고 왔는데 다들 주제처럼 근엄하게 옷도 잘 입고 오셨다. 그게 눈에 띄었는데 담당자님이 다가와 교육생 대표를 하라고 했다. 옷부터 반헌법적인데 뭘 시키냐는 표정으로 정중히 거절했다. 담당자님은 내 이름표를 쓰윽 보더니 같은 행안부끼리 도와달라고 하며 선물도 준다고 했다. 얼굴에 복이 많아 보이셔서 부탁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종교를 여쭤보고 싶었지만 매시간 강사소개만 읽으면 된다기에 그냥 알았다고 했다. 셔츠라도 입고 올걸 아니 검은색이라도 입고 올 걸 싶었다. 회색은 너무 예비군스러웠다.     


입소하면 이런 거 찍어줘야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았다. 헌법정신은 휘발성이라 시기마다 채워줘야 하나 싶었다. 비록 어리게 입고 갔음에도 앞을 보고 있는 뒷사람들이 내 휑한 정수리를 보면 저 사람도 헌법정신 나라사랑 충전하러 왔나 싶었을 것이었다.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딱딱하고 일방향 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교수님들은 헌법을 매개로 본인 생가도 말하고 인생사도 풀고 자랑도 하고 그랬다. 잘 모르지만 이런 것처럼 모든 것의 시작이자 해석틀이 될 수 있는 게 헌법의 기본성격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과장님이 헌법이 뭐냐고 질의하셨을 때 ‘헌법은 모든 것입니다’라고 하면 다음 분기 어느 새벽에 또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수 있기에 다른 답변을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기대가 되었다. 여기는 전북특별자치도지만 광의의 남도 아닌가. 남도급식은 어떤가 궁금했다. 내 입맛의 허들이 워낙 낮긴 해도 이 정도면 훌륭했다. 여기는 지방공무원 5급 승진자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분들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구내식당이 생명유지기능 만을 담당했다면 지방자치인재개발원 앞은 먹자골목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역시 남도라도 하며 그릇을 치우다 벽을 보니 눈에 익은 상표가 보였다. 검색해 보니 풀무원 업체였다. 약간 움찔했지만 완주 식자재를 쓴다니 그냥 향토음식 먹은 걸로 치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지도를 찾아보니 기관 앞에 음식점이 꽤 많았다.    



여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위에 말한 지방 5급 승진자들이었다. 오랜 공직생활에 일부지만 나름 보상을 받아서인지 다들 밝고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얼굴에는 세월이 묻었지만 표정은 새터 가는 대학생이었다. 그걸 보고 우리 교육생들을 보니 좀 우중충했다. 앞자리는 더 그랬다.      



수업이 끝나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느낌이 서귀포랑 비슷했다. 산이 낮고 평지라 시야가 트여서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산 대신 아파트는 있었어도 동네가 평온하고 조용해서 산책하기 좋았다. 다만 추워서 오래 건지는 못했다. 분명히 전날은 18도였는데 오늘은 한참 남쪽인 이곳이 1도였다. 한반도 살만큼 살았음에도 이 땅의 날씨는 적응이 힘들다.      


아파트는 늘 우리 곁에


저녁 먹으려고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대부분 가게가 무리들이 전세를 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승진자과정 수료날이라 그런 것 아닌가 싶었다. 춥고 배고파서 그냥 개발원으로 돌아가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짬뽕 먹고 싶었는데 못 먹어서 남도 급식도 그저 그랬다. 타지에서 혼자 자는 게 오래간만이라 과자 하나 까먹으려고 구내 편의점에 갔다. 가격에 놀라도 칼로리에 두 번 놀라서 제로콜라 하나 사 갖고 갔다.     


숙소는 1인실을 썼는데 괜찮았다. 이름은 목민관이었다. 시대가 좋아져서 나 같은 미관말직에도 독방을 줬다. 3인 1실 정도 예상했으니 약간 고시원스러웠지만 상관없었다. 수건도 주고 휴지도 줬다. 창문을 열고 누웠다. 하루 종일 어울리지도 않는 공부를 했더니 피곤했다. 원래 하던 대로라면 각 교육마다 중간에 나가서 30분 정도 이 수업은 무엇일까라는 사색을 하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담당자님이 교수 소개를 맡기셔서 그럴 수 없었다. 인상 좋다고 하셨지만 옷차림이나 표정을 보면 바로 땡땡이칠 것 같아 잡아두신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루 이틀 교육생들 본 게 아닐 테니 말이다. 씻고 넷플릭스에서 ‘살인자 o 난감’을 절반 보고 잤다. 게임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혹시 딸이 이모랑 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서 그랬다. 아내가 듣자니 대단한 부정이라고 했다.

     

이정도면 훌륭한 숙소


잘 자고 일어나서 씻고 짐 챙겨 나왔다. 구내식당 아침식사가 8시 반까지라서 서둘렀다. 뚝배기 콩나물국이 나왔다. 어릴 적에는 이런 걸 왜 돈 내고 먹나 생각했는데 나이 드니 콩나물국이 좋아졌다. 곧 있음 끼니로 죽 먹고 그럴 것 같아 슬펐다. 후식으로 나온 셀러리 주스가 맛있었다. 1층으로 올라가니 꽃다발 화환들이 가득했다. 예전에 갔었던 어느 고위직 자제 결혼식이 작은 식물원 같았는데 여기도 비슷했다.       



8시 20분쯤 강의실에 도착했다. 담당자님이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계셨다. 왜 이렇게 일찍 준비하시나 했더니 8시 반 넘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다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르니 조용하던 복도가 인원들로 가득 찼다. 이 사람들이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싶어서 인간이 과연 뭘까란 상념이 좀 떠올랐는데 철학적 기반이 부족하여 그만두었다. 오래간만에 한가하니 이런 기분이 든다.     



둘째 날 1교시는 법철학이었다. 모두 잘 줄 알았는데 다들 깨어있었다. 역시 공무원 기본 미덕은 인내심이 아닐까 싶었다. 아님 원탁 배치라 서로 눈치가 보였나 싶기도 했다. 과연 견제와 균형은 중요했다.      



점심 식사는 급식의 왕인 제육볶음이 나왔다. 제육볶음이 없는 세계의 배식은 돈가스 독점 시대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 느끼해졌다. 단체 식사에서도 견제와 균형은 필요했다. 빨가면 무조건 맵다고 먹지 않는 돈가스 열심당원 이재하에게 어서 제육볶음을 전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심지어 얘는 정통돈가스도 아니고 치즈돈가스를 따르는 사파라 더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2교시는 헌법과 행정법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그대로 하면 재미없다고 세계사와 관련지어서 강의를 해주신다고 하셨다. 다만 사람들이 마지막 시간이라 식물처럼 앉아 있자 폭풍 질문을 시작하셨다. 맨 앞에 앉은 벌로 나는 교수님과의 양방향 수업 시연자가 되었다. 법이나 행정 질의응답이었으면 모른다고 대충 웃음으로 때울 텐데 역사 문제가 자꾸 출몰하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름 학예 부문 종사자인데 모르는 건 기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거였다. 어쩌다 한두 문제 넘어가니 더 긴장이 되었다. 문제를 맞힐수록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요가 선생님이 어깨 좀 피랬는데 말짱 도루묵이었다. 수업 끝나고 교수님은 만족하셨는지 다음에 또 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냥 웃었지만 속으로는 좀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담당자님이 강사 소개 하느라 고생했다고 기념품을 주셨다. 미니 가습기였다. 안 그래도 자리가 완전 건조해서 하나 마련할까 고민했는데 좋은 선물 받았다. 요새는 세상이 좋아져서 모바일로 피드백을 했다. 하기는 나도 MZ 끄트머리에 걸쳐있는 사람인데 이런 걸로 시대가 진보했다고 말하면 안 되었다. 아무튼 기분이 좋아져서 설문지를 후딱 읽고 모두 만족으로 눌렀다. 담당자님이 솔직하고 긍정적인 답변 해달라고 하셨으니 나도 마땅히 그랬다.      



관건은 빠르게 집에 올라가는 거였다. 금요일 오후는 여기서 지체하는 10분이 오산에서 30분이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고도 싶었지만 참으며 달리고 달렸다. 아내가 중간에 전화 와서 쉬었다 가라고 유혹했지만 이겨냈다. 신갈 ic 나오자 네비가 3분마다 경로를 바꿨다. 그래도 주말초입 치고는 무난하게 3시간 좀 넘어 집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생선 잡고 싶었지만 피곤해서 그냥 잤다. 멀기도 멀었지만 재미있는 여정이었다.     



월요일에 과장님께 가서 다녀왔다고 보고 드렸다.

“잘 다녀왔어? 뭐 배웠어?”

“네. 헌법전사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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