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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Oct 08. 2019

세 가족의 첫 아침

재하와 만나던 날

재하의 예정일이 가까워 올수록 나는 불안 초조에 시달렸다. 각종 미신에는 귀가 펄럭거렸고, 온갖 징조는 덤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 딸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아침에 까치가 울면 오전에는 ‘귀한 까치님이 알려주셨으니 오늘 우리 딸이 나오려나...’라고 되뇌다 오후가 되면 ‘분명 까치 놈이 울어재꼈는데 왜 안 나오지? 사기꾼 같으니... BB탄으로 쏴버려야겠다’를 반복했다. 사실 까치는 만날 울고 있었다.      


심란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도 가지가지 꿈을 매일 꾸어댔다. 우리 엄마는 꿈에서 재하 얼굴을 봤다고 주장했다. 이목구비 묘사하는 걸 대충 들어보니 엄마가 어젯밤에 보고 잔 드라마 여주인공 얼굴이었다. 내 동생은 은하수가 펼쳐지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곧 아기가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처가댁에서 사흘 동안 불침번을 섰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옥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가짜 뉴스를 종종 만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기가 나오려면 열심히 운동하라고 이야기하셨었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우리는 꽤 먼 거리도 도보를 이용하곤 했다. 한참 걷다 보면 아내가 진통이 있다며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배 아파? 119 부를까? 택시 타야 하나? 어쩌지?” 

“괜찮아. 이 정도로 병원 가면 두 시간 짐볼 타고 오라고 돌려보낼걸. 일단 집에 가자.” 

그래 놓고 집에 가면 “남편~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다리나 좀 주물러 주지 않으련?”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번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배 아파? 119 부를까? 택시 타야 하나? 어쩌지?”라고 내가 오두방정을 떨면

“괜찮아. 이 정도로 병원 가면 두 시간 짐볼 타고 오라고 돌려보낼걸. 일단 집에 가자.” 하고

“남편~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다리 포함해서 허리도 좀 주물러 주지 않으련?”의 반복이었다.

다시는 안 속겠다고 다짐해도, 임산부가 아프다는 데 일단 검증부터 하자는 내일이 없는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양치기 임산부였지만 내 새끼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 늘 울면서 달려야 했다.      


이러고 놀러다닐 때가 좋았는데....

39주째 되던 날 병원에 가서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결전의 날은 예정일이었던 9월 24일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나에게 좋은 날을 뽑아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재미 삼아 취미로 동양철학(?)을 조금 공부해서였다. 나는 별 뜻 없이 대꾸했다.

“자기 팔자는 타고난 대로 사는 거야. 그렇게 인위적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소.”

“뭐? 남의 자식은 잘만 해주더니. 네 자식은 왜 안 해주냐.” 하면서 아내가 멱살을 잡자, 폭력에 약한 난 겁에 질려 잘 준비해서 보고 드리겠다고 했다. 어쨌든 지시가 내려왔으니 난 성심성의껏 시간별로 분석해 재하 어머니께 올려 드렸다. 옥은 흡족하게 보고서를 살펴보시고는 이날 이날이 좋겠다고 몇 개를 추리셨는데 그 날 중 하나가 예정일이었다. 마침 또 그때 수술 시간도 비었다기에 그 날 재하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비과학적인 것 잘 알지만 자식 나올 때가 되니 별 짓을 다하게 된다.     


출산 날짜가 정해지자 아내의 마음이 편해 보였다. 내진할 때 많이 아팠어서 자신이 없었는데 잘 된 것 같다고 했다. 혹시 그전에 재하가 나올지도 모르니 운동 중단도 덩달아 선언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역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수술까지는 스무 끼 남았어. 다 먹고 들어간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산까지 열두 끼, 출산까지 다섯 끼, 입원 전 마지막 식사 등등, 이렇게 수술 전 남은 날을 맛집 버킷리스트와 함께 세다 보니 어느새 입원 날이 다가왔다. 입원하기 전 핫케이크와 봉골레 파스타를 양껏 드신 옥과 나는 병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때 아내의 가는 길이 안쓰러웠는지, 처가댁 늙은 개 코비가 갑자기 사방에 똥을 뿌리며 우리의 앞길을 축복해 주는 것이었다. 오물을 뿌리는 나름의 정화의식으로 액운을 쫓아냄과 동시에 자기를 잊지 말라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긴장하지 말라는 코비의 속 깊은 행동에 열이 확 올라 혈액순환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매번 다니던 병원으로 갔다. 수납을 하고 4인실을 배정받았다. 요새는 통합 간호병동이라 하여서 보호자 상주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간호사 선생님이 오늘은 수술 전날이니 옆에 있어도 봐준다고 하셨다. 환자복을 갈아입으니 영락없는 병자였다. 옥도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펴고 누웠다. 나는 옆에 있는 쪽 의자에 앉아서 짐들을 정리했다. 괜히 시무룩해지고 있는데 아내가 벌떡 일어나서 팔을 휘둘렀다. 매의 눈으로 모기를 보았나 보다. 모기들을 잡는다며 침대에서 뛰어다니는 옥의 용맹한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아내는 문진도 하고 제모도 하고 검사도 하는 등 준비를 착착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해줄 게 없어서 기도문이니 외우며 멍하니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내에게 물어봤다.

“옥~ 저녁을 무엇으로 준비할까?”

“병원 밥 나오는 거 아니야? 자기 꺼나 사와.”

“아니야. 그 밥 내가 먹으면 돼. 먹고 싶은 거 말해봐. 들어가는데 맛있는 거 먹어야지.”

“우리 남편은 역시 자세가 되어 있어. 1순위는 충무김밥이고 2순위는 참치김밥이야.”

“누가 보면 병원으로 소풍 온 줄 알겠어. 아 그나저나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 제모할 때 어땠어?”

“안 그래도 궁금해서 보고 싶었는데 배가 너무 나와서 못 봤어.”     


김밥을 사러 나가는 길이나 되어서야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밝게도 보였다. 보통 병원에서는 생로병사가 뒤엉켜 있어 그런지 방문할 때마다 무거운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산부인과 특화 병원은 생의 시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런지 다들 긴장과 함께 기대가 가득 차있는 모습이었다. 부모와 자식이 처음 인사할 이 곳은 기다리고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만나던 공항에서 보던 풍경과 비슷했다.     


포털사이트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었던 주변의 충무김밥 집은 모두 폐업하거나 점포를 옮겼다. 덕분에 헛걸음질을 두 번이나 했다. 까치 놈들이 귀한 손님 온다고 했는데 안 온 것처럼 포털도 있다고 했는데 없었던지라 이것도 불길한 징조인가 투덜거리며 참치김밥을 사서 병실로 들어왔다. 그래도 아내가 맛있게 먹어서 위안이 되었다. 나는 흰쌀밥, 고등어조림, 미역줄기 무침, 멸치볶음, 된장국, 배추김치를 먹었다. 기분 탓인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102 보충대 맛이었다.     


병실에서 함께 잘 수는 없어 일단 집으로 향했다. 운전하면서 생각해보니 곧 딸이 태어날 테니 늙은 아빠와 세대차이가 너무 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음악들을 기분도 딱히 아니었고 그래서 ‘요즘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를 알아보려 라디오를 틀었다. 뭘 틀까 하다가 이름부터 어려 보이는 ‘영 스트리트’를 선택했다. 20년도 더 된 옛날에 김예분 씨가 진행하는 걸 들었었는데 참 장수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올라오는 사연들을 보니 ‘애기 키우기 힘들어요’, ‘30대 중반인데 결혼 꼭 해야 할까요?’, 그나마 좀 젊은 이야기가 ‘취업 드디어 성공했어요’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예분 씨 진행하던 걸 청취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로 요즘 세대는 공중파 라디오를 잘 안 듣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라디오로 요즘 친구들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세대차이는 다른 걸로 좁혀야겠다.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두리뭉실하게 있다가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수능날도 입대날도 시험날도 모두 아침은 잘 먹었는데 그 날은 도저히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나왔다. 새벽에 아내에게 문자가 와서 입원실을 1인실로 바꿔달라 해서 그것도 처리해야 했다. 밤새 불편했는지 회복은 편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침이라 덜 막혀서 7시 조금 넘어서 병원에 도착했다. 원무과에서 1인실 교체를 요청하니 바로 수락되었다. 돈 받을 때는 모두가 너그럽다.      


심호흡을 하고 아내의 병실로 갔다. 손에 수액을 맞고 있었다. 다른 쪽 손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시퍼런데?”

“새벽에 간호사님 하나가 잘못 꽂아서 여러 번 했는데, 그래도 실패해서 반대에 꽂았어.”

“헐. 멍이 이렇게 들 정도인데? 미안하다고는 했어?”

“어 다른 분이 와서 사과하고 다시 잘해줬어. 신입이었나 봐.”

“아니 그래도 사람 이렇게 아프게 하고 말이야. 칭찬합시다에라도 써야 하는 거 아냐? 수술 날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니야 됐어. 괜찮아.”

“흥이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단식해서 목마르겠다.”

“생각보다 괜찮아. 그리고 어젯밤에 편의점 가서 초코우유 하나랑 커피우유도 하나 사 먹었어. 열한 시 반에.... 까르르르”

“음... 그새 군것질을 하다니 우리 와이프 답네. 재하는 좀 어때? 오늘 자기 나오는 줄 아나?”

“그르게. 이제 체념했는지 시위 중단하고 조용히 있던데.”     


아내는 침착하고 담담히 있었는데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말만 해도 눈물이 나와서 천정을 보면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아내는 여기 보라면서 사진을 찍으며 놀려댔다. 옥이 화장실 간 사이에 주치의 선생님이 회진을 왔다 가셨다.

“주치의 선생님 그 사이에 다녀가셨어.”

“뭐라셔?”

“수술은 하기로 했던 열 시에 한 대. 그리고 나한테 금방 끝난다면서 너무 걱정 말라고 했어.”

“그럴만해. 자기 얼굴 거울 한번 봐봐. 애는 자기가 낳는 거 같아. 이건 붉은 것도 아니고 허옇게 질린 것도 아니고.”

아무튼 의사가 환자가 아닌 보호자를 위로해 주고 갔다.     


출산날 이런 사진 찍고 있는 아내라니...

이제 시간이 다가왔다. 옥을 수술실로 안내해줄 선생님이 오셨다. 머리는 양갈래로 묶고 휠체어에 태워서 아내를 데려갔다. 나는 그 뒤를 엉엉 울면서 쫓아갔다.

“아니 산모님은 잘 계신데, 아버님이 더 우시네요.”

“아 남편이 좀 유리같이 섬세해서요.”

“아이고 아버님, 한 시간도 안 걸려요.”

둘이 내 흉을 보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한창 울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벽에 붙어 있는 병원 식단표를 보았다. ‘갈치조림’, ‘코다리 튀김’, ‘무나물’, ‘시금치 된장국’ 등을 보니 눈물이 좀 들어갔다.  

     

아내는 나에게 신발을 맡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또 눈물이 나서 옥의 슬리퍼를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그 날은 대기실에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았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성을 찾으려고 식단표를 다시 떠올렸다. ‘갈치조림’, ‘코다리 튀김’, ‘무나물’, ‘시금치 된장국’. 구내식당 표준 메뉴들이 함께 나를 위로해주니 군대 생각도 나면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더디 흘렀다. 수술실 앞에서 일초 일초가 흐를 때마다 삶을 뒤돌아보며 반성과 참회와 앞날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제는 제대로 살겠다’며 백번쯤 스스로 각오를 다지고 시계를 보면 2분이 지나 있었다. 기도문도 외우고 노래도 머릿속으로 부르고, 오늘의 주요 소식을 살펴보면 3분이 지나있고 그랬다. 마음속에서는 재하가 이미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가고 성인이 되어 시집을 간 후 또다시 아이를 낳고 내가 죽을 때쯤 돼서 ‘너를 만나 행복했다’라는 유언을 하고 있어도 기껏해야 5분이 흘러있었다. ‘태정태세문단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복무 신조! 우리의 결의’ 외울 수 있는 건 다 외우고 다시 돌리고 돌리고 돌리니 그제야 30분가량 흘렀다. 카페나 블로그에서 미리 검색해 본 바로는 20분이면 아기가 나오고도 넉넉한 시간이라고 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10시 되기 전에 들어가서 10시 5분 수술실에 입장했음에도 30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얗게 타버린 40분이 지나자 ‘이정옥 산모 보호자’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딸을 만날 시간이었다. ‘네! 네!! 네!!!’를 외치며 달려갔다. 미리 의식을 해두었던 것은 처음 아기가 태어나면 외계인같이 쭈글쭈글한 것이 못생겼으니 실망한 표정 짓지 말고 최대한 자애로운 표정으로 딸을 맞이해야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재하는 생각보다 정말 멀쩡했다. 보통 아가들의 최초 모습을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이라고 친다면, 우리 딸의 모습은 수련회 다녀온 정도(?)였다. 그것도 2박 3일이 아닌 1박 2일 정도. 머리숱도 많고(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피부에 묻은 것도 별로 없었다. 내가 앞에서 엉엉 울고 있자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버님, 그만 우시고요. 손가락 발가락 확인하셔야 됩니다.”

다행히 한쪽에 다섯 개씩 손, 발 다 제대로 있었다. 재하 관계자들에게 보낼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이제 신생아 실로 이동해야 한다고 하셔서 아기 카트 뒤를 졸졸 쫓아갔다. 


왜 갑자기 끄집어 내냐!!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지 괜찮았다. 슈퍼맨이 된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도 웃고 다니니 마주치는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었다. 덤으로 아기 예쁘다고 하니 귀도 함께 팔랑거렸다. 아기는 다 예쁘고 의례상 칭찬하는 것이었겠지만 자식 칭찬을 받으니 괜히 으쓱했다. ‘자기 새끼는 지만 이쁘지’와 같이 그간 이웃 자제들에 대해 박한 소리를 했던 나를 반성하며 앞으로는 좋은 얘기만 주변에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생아실 앞은 난리였다. 오늘 태어난 아이들은 좀 길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아이돌 쇼케이스 장을 방불케 했다. 아기들이 놀랠까 봐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다만 여러 팬클럽들이 뒤엉켜 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뒤덮여서 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재하의 이름은 ‘이정옥 아기’였다. 나도 ‘이정옥 신랑’이었던 적이 있기에 동질감도 느껴졌다. 우리 딸은 신생아실로 몸을 데우기 위해 들어가고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유의사항에 대해 들었다. 나가서는 우리 집, 처가댁 식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재하의 탄생을 알렸다. 장모님은 전화를 받지 않으셨는데, 쿨 한 그분은 목욕탕에 가 계셨다고 한다.      


여기저기 알리자 친구 도근이에게 고생했다고 전화가 왔다. 

“진짜 쪼끄매. 금방 크겠지?”

“야 그전에 ‘언제 크냐 이 새끼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걸. 그래도 축하한다”

육아 선배로서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재하 관계자들에게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고, 입원실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니 아내가 회복실에서 나왔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고생했다고 하며 우리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손발도 멀쩡하게 잘 달고 나왔다고 했다. 옥은 한 마디 하며 눈을 다시 감았다.

“1인실로는 잘 바꿨지?”     


아무튼 우리 셋은 그날 처음 만났다. 2019년 9월 24일 오전 10시 20분, 우리 세 가족의 첫 아침이었다.     


     

내 밥은 아빠가 책임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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