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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18. 2019

구기선수 홍영기를 기억하며

나의 사랑하는 친구 홍영기가 구기 종목에서 은퇴했다.
무릎에 이상이 생겨서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는다.
  
홍영기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남자아이들은 학기 초에 자기를 구타할지 모르는 혹은 때릴만한 급우를 고르는 행동을 한다.
서열정리라고도 하는데 나 같은 먹이사슬 최하위의 초식동물에게는 생존에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영기는 깍두기 머리와 단단한 사각턱, 황토색의 몽골리안 얼굴빛으로 중후함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일단 나에게는 주의대상이었다.
  
하지만 수업시간마다 반 아이들은 홍영기를 놀려댔다.
선생님이 왜 이렇게 교실이 더럽냐고 하면 - 홍영기’, 수업시간에 왜 이렇게 떠드냐고 하면 - 홍영기이런 식이 었다.
거기에 유지태를 닮았다고 하며 잘생기면 다냐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은 낯빛과 체형이 더 중년에 가까워져서 유지태 씨와 엮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명예훼손 같지만 돌이켜보면 약간 억울하게 닮기는 했다.
아무튼 친구들이 놀릴 때마다 영기는 예의 그 엷은 일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었다.
  
체육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늘 우리는 농구를 했다.
우리 반 애들은 축구를 많이 하고 남은 애들이 농구를 하는 식이었다.
우리 학교는 그때 강당을 새로 지어서 급식식당 앞에 우레탄 바닥이 완비된 최신식 야외 농구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내내 뛰어놀았다.
고등학교 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이라고는 거기에서 농구를 했던 것 밖에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2부 리그라고 불렀는데 그 정도로 실력들은 별 것 없었다.
넣는 것보다는 못 넣는 것이 당연한 그런 모임이었다.
하지만 영기만은 독보적이었다.
정말 잘했다.
물론 종호도 농구를 잘 하긴 했지만 그건 예체능 센스가 좋은 것 인 것 같고 청운관 농구장에서 영기는 the Lionheart, 사자의 심장 그 자체였다.
양 떼들 사이에서의 영기는 에이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무작위로 주장을 두 명 뽑아 가위바위보를 하며 한 명씩 뽑는 방식으로 팀을 정했는데 영기는 늘 1 픽으로 뽑혔다.
나는 잘해봐야 한 4 픽쯤 되었을까?
영기가 주장을 할 때에는 고맙게도 종종 나를 2 픽쯤에 간택해 줄 때가 있었다.
날 선택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분명 아무 생각 없었을 거다.
  
고3 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사랑의 매를 굉장히 빈번하게 사용하셨다.
공부 외에 모든 행위는 탄압을 받았는데 농구는 그 금지 대상 1호였다.
그럼에도 테스토스테론이 넘쳐나는 19살 남학생들이 공만 보면 불나방처럼 온몸을 던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는 유격대 정신으로 농구대로 가는데 2, 팀 짜는데 1, 공 던지는데 7분을 짜임새 있게 쓰며 쉬는 시간 10분을 꽉 채워 사용했다.
물론 내 엉덩이는 소중했기에 난 종 칠 때쯤이면 슬그머니 들어갔다.
하지만 공놀이 앞에서는 의인이며 늘 올곧고 정직했던 영기는 꿋꿋이 수업이 시작해서야 교실에 들어왔다.
  
내 몸에 고통을 가할 수 있겠지만 나의 신념을 꺾을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이렇듯 공놀이 앞에서만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았던 영기는 늘 곡소리 나게 맞았다.
그러나 분명히 1시간 전에 볼기짝을 두들겨 맞았음에도 다시 코트를 들소처럼 누비는 홍영기의 모습은 구기 선수 홍 the Lionheart 영기, 그가 운동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한 게임 한 게임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그였다.
그리고 또 맞았다.
물론 나는 도망가서 당연히 맞지 않았다.

(가운데가 홀쭉하던 시절의 영기, 왼편은 충식 오른편이 젊은 시절 필자, 14년전 교회 밴드)
  
우리는 대학에 가서도 밤에 탄천 가에서 종종 농구를 했다.
영기는 그때 나이키 포스를 사고 싶어서 피자집에서 배달 알바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신발과 비슷한 것을 신고 왔다.
알고 봤더니 지마켓에서 산 비슷한 물품이었다.
정품도 아닌 것으로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뛰어댔으니 유사 나이키가 버틸 수는 없었다.
짝퉁에게도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 번을 갈아치웠다.
그럴 거면 차라리 진짜를 사지 그러냐고 했더니 이제는 돈이 없다고 했다.
이렇듯 영기는 늘 나에게 교훈이 되는 친구다.
  
결혼을 하고 일을 하며 30대가 되더라도 영기의 운동 실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먹더라도 5시에 다시 일어나 스피닝을 하러 나갔다.
검색해보면 피오줌을 싼다는 부작용이 인터넷에 넘쳐난다지만 영기는 끄떡없었다.
힘세고 강한 사나이, 그 이름은 바로 홍영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기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신석기쯤 태어났으면 부족의 영웅, 시대를 여는 선구자였을 텐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태어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이런 영기가 러시아 출장 중에 무릎을 다쳤다.
블라디보스토크, 캄차카 반도, 북 쿠릴 열도를 오가며 독립운동가 마냥 시베리아를 누비며 비즈니스를 한 부작용이었을 거다.
수술도 했다.
수술 전에 전화를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 했다.
전신마취를 하는데 못 깨어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더니 그제야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생각 못했다고 했다.
그럴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목소리나 들으려고 연락했다고 했더니 꺼져 xxx라고 나쁜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무언가 안심이 됐다.
하지만 더 이상 구기 선수 홍영기를 볼 수 없는 세월의 야속함에 슬퍼지기도 했다.
  
수술을 하고 깁스도 했는데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니 제주도까지 날아왔다.
그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이 글을 쓴다.
또 이매고등학교 3학년 22부 리그 위대한 에이스 홍영기가 이대로 잊히는 것은 역사 앞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구기 선수 홍영기는 가고 없지만 그는 늘 우리 친구들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공놀이가 생각나더라도 지난 일들은 모두 잊고 남은 시간에 가정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이제는 정말 풍채 좋은 우리 영기, 보이지는 않지만 깁스를 하고 왔다, 결혼식 피로연)


p.s : 1년 반 전쯤 결혼식 부근에 쓴 글입니다. 브런치에 올리는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성실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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