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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Dec 03. 2019

모자동실 이야기

단기속성 육아체험

우리는 출산 사흘 후에 모자동실을 용감히 신청했다. 원래는 출산 다음날부터 해보려고 했는데 신생아실 간호사님들이 말려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수술 다음날 옥은 움직이지도 못했기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소변 줄도 빼지 않아 아기 면회도 가지 못했다. 원래 아내는 모유수유 교육도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실은 미음 섭취 교육부터 가야 할 판이었다.     


모자동실은 산모와 아기가 병실에서 함께 지내게 하는 제도였다. 그동안 몸으로 엮여 가깝게는 지냈지만 실제로 얼굴 본지는 얼마 되지 않는 두 사람을 위한 ‘친해지길 바래’ 같은 거였다.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 같이 훌륭한 곳들은 100% 이 모자동실을 운영한다고 하니 왠지 신뢰가 가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출산한 병원은 신청인에 한해 모자동실을 운영했다.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어 하는 우리 아내가 이걸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신생아실에 문의를 하니 다음날 오전에 우리 딸을 올려주기로 했다. 최소 12시간 데리고 있어야 하며 그 기간에는 교환 환불이 어렵다는 무시무시한 특약도 덧붙였다.      


입원 나흘째, 출산 사흘째 되던 목요일 아침 9시에 우리 딸은 투명 아동용 손수레에 실려 우리 입원실로 올라왔다. 세 가족이 처음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음이 벅차오르고 눈물을 흘리며 ‘oh my sweet baby~’를 연발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주 건조했다. 재하를 운송해온 간호사님은 젖병 물리는 법, 기저귀 갈아주는 법, 속싸개 싸는 법을 3분 동안 속성으로 알려주시고는 총총총 사라지셨다. 꼭 차트에 기록도 잘 남기라는 말도 하셨다. 담당 어린이 한 명을 홈스쿨링 보내버려서 인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문의사항 있으시면 신생아실로 연락 달라고 했다. 물론 12시간 동안은 교환 환불 안되고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부모가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도 웃으며 받아가셨다. 서명은 내가 했으니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육아의 이응자도 모르는 내 책무가 되었다.      


우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간호사님이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자 적막에 휩싸였다. 나는 멀뚱멀뚱 두 사람만 쳐다보았다. 아내는 감동한 표정으로 있길래 모녀상봉의 여운을 즐기나 했지만 하고 있던 게임 스테이지를 깨서 그런 것이었다. 딸 출산 날에 사우나 가시고 저녁 면회 때는 드라마 보시느라 오지 않으신 장모님의 딸다웠다. 아무튼 그랬어도 소변줄 제거했지만 45도로도 앉지도 못하는 산모, 3.18kg로 태어났지만 부기가 빠져 3.02kg인 인생 사흘 차 아이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겁이 확 났다. 순간 사인을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며 혹시 30분 내 철회는 어려운지 물어보고 싶어 졌다. 쿨한 아내였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그녀의 예민해진 호르몬들을 자극시킬 우려가 있었다. 출산 후 일주일 내지 열흘간은 특히 입방정을 조심하라는 친구의 경험담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방금 태어난 딸이 ET같이 생겼다는 십 년 전의 한마디로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인 이들에게도 왜 그랬냐는 갈굼을 받고 있었다. 아마 딸의 아이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겠지. 친구의 피맺힌 하소연을 상기하며 자나 깨나 입조심을 마음에 새겼다.     


어느덧 첫 맘마 시간이 다가왔다. 면접 볼 때보다 더 떨리고 조마조마했다. 일단 분유 30ml를 받기 위해 신생아실로 가서 인터폰을 눌렀다. 아까 데려다 주신 간호사님이 나오셨다. 분유를 내주시며 잘 깨워서 먹이라 했다. 꼭 다 먹어야 한다 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산신령에게 주의사항을 듣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다 먹이겠다는 서약서는 받지 않으셨다. 나는 입원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입가에 톡톡톡’을 주문처럼 외우며 올라갔다. 간호사님이 알려주신 자는 아기 깨우는 방법이었다. 마침내 곤히 자는 딸의 입가에 분유병을 톡톡 두들겼다. 딸은 당연히 미동도, 반응도, 정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log함수를 포기하고 수능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수리 1번 문제에 log가 나온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자기야 재하가 꼼짝도 안 하는데?”

게임을 하면서 아내가 말했다.

“다시 두들겨봐.”     


안 먹겠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은 뻥이었다. 사실 수유가 더 힘들어 그렇지 밥을 먹이기 위해 재하를 안아 팔 위에 얹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딱 짐 나르다 허리 다치기 좋은 자세로 구부정하게 아이를 수레에서 끄집어내어, 침대에 간신히 앉아, ‘입가에 톡톡톡’을 서른 번은 외우며 가져온 분유를 입가에 톡톡톡 전달했지만 재하는 잠만 잤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등 뒤에는 땀이 났다. 간호사님이 식은 분유를 아기가 먹으면 배앓이를 한다는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입가를 두드리는 동안 분유는 식어갔다.      


입가에 대고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있는 나보다 아내는 냉철했다. 인터넷을 재빨리 검색했다. ‘귀를 만져주세요’, ‘발을 때려주세요’ 등등이 나왔다는 것 같았다. 아내의 지시대로 나도 딸의 귀를 만지며 딸의 발과 접촉했다.

“간지럽히지 말고 때리래.”

아니 얘를 때릴 데가 어딨다고. 하지만 내가 맞을 것 같아 눈을 딱 감고 딱밤을 재하의 발에 날렸다. 귀도 사정없이(?) 주물렀다. 재하는 혈액순환이 잘되어서인지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더 잘 잤다. 아내는 이리 내놓으라며 신음소리와 함께 침대를 60도로 올렸다. 통증을 이겨내는 모정은 위대했다. 아내가 당신의 고통을 담아 재하의 발바닥을 부싯돌 치는 마냥 ‘딱’ 때리니 재하는 눈을 번쩍 뜨며 밥 달라고 울어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유는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나는 다시 3층에서 지하 1층으로 뛰어내려가 분유를 다시 받았다. 이번엔 ‘입가에 톡톡톡’ 대신 ‘시발시발’을 중얼거렸다. 어디서 주워듣기로 신생아가 3시간 내에 밥을 못 먹으면 탈진한다고 해서 긴장도 되었다. 서명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재하의 골든타임 일지 몰랐다. 그 짧은 시간에 온 몸을 땀으로 적시며 늙은 아빠가 뛰어 올라와 30ml의 분유병을 내미는 순간 우리 딸은 다시 잠이 곤히 들어 있었다.     


체력이 다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와중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토르르르륵’을 숨넘어가게 읊조리며 재하의 입에 댔다. 다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부싯돌도 소용이 없자 나는 정말 반쯤 울면서 신생아실로 전화했다

“신생아실입니다.”

“헉헉...저는 방금...하악...분유....허억...타 간 이재하...아아앙...빠인데요....으흥....애기가...엉엉엉...밥을...끄윽...맘마를....헉헉....안 먹어요...흐응...눈을...엉엉엉...안떠요...하앙...”

스토커 변태 같은 말투였는데도 간호사님은 친절히 올라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간호사님은 ‘프로페셔널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오셨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분유병을 넘겨받아 재하의 입을 두드렸다. 거짓말 같이 내 딸의 입이 열렸다. 심지어 ‘입가에 톡톡톡’을 외지도 않았다. 심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난 빡침 30%, 힘듦 20%, 괴로움 20%, 막막함 10%, 자괴감 20%의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간호사님은 아기 밥 먹이는 것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는 간지 나는 표정과 후광을 내뿜으며 사라지셨다. “처음엔 다 그러세요.”라는 말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면 또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교환 환불은 어렵다는 무언의 메시지와 함께. 그리고 앞으로 10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엄마가 주니까 먹어야지...


두 번 물어보는 것은 내 사전에 있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에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였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재하가 다시 자는 사이 유튜브에서 젖병 물리는 법을 한 시간 동안 보았다. 눈에 하도 힘을 주고 봤더니 뻑뻑하니 아팠다. 허무하게도 두 번째는 잘 먹었다. 그 이후로는 요령이 생겨서인지 적당히 두드리면 젖꼭지를 잘 물었다. 재하가 아빠에게 신고식을 한 번 한 것 같았다. 가끔 다 먹지 않겠다 해서 남겨 가면 간호사님께 혼났기 때문에 남은 분유는 화장실에 몰래 버렸다. 차트에도 남기지 않고 잘 먹었다고 썼다. 한 5~10ml쯤 덜 먹는다고 탈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똥이었다. 진지하게 신생아 무게의 3분의 1은 응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대여섯 번씩 내 눈앞에 산더미 같은 응가가 쏟아졌다. 문화충격이었다. 이걸 다 언제 먹었지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일부 분유는 내가 아까 화장실에 버렸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자기 전에 딸의 얼굴 대신 형형색색의 응가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이렇게 먹는 대로 쏟아내서 똥에 영양분이 다 가면 키는 언제 크지란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쓰레기통에 그냥 응가 기저귀를 버렸더니 병실에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했다. 응가향 방향제를 방안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처가댁에서 비닐봉지를 공수해와서야 이 냄새가 진정되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딸꾹질이었다. 나는 어릴 적에 딸꾹질을 하도 하여 ‘보리차 먹어 보리차’라는 말이 귀에 선했다. 그런데 재하가 아빠를 닮아서인지 딸꾹질을 연거푸 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문제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다들 태평하게 딸꾹질은 아기에게 자연스러운 거라며 젖을 물리든 하라고 했다. 아니 내 딸은 지금 딸꾹거리다 숨넘어가게 생겼는데. 그리고 모유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게임을 하며 모성을 끌어내고 있었지만 수술 자국이 더 아픈 것 같았다. 다시 간호사실로 전화했더니 재하를 울리라 하셨다. 내가 울고 싶었다. 발바닥을 부싯돌이라 여기며 딱밤을 때렸지만 내가 때려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아내가 때려야 ‘으윽...’ 정도 소리를 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재하는 헛울음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재하는 밥 먹고 똥 싸고 딸꾹질하고 잠자고 하는 대략 2시간 정도의 주기가 있었다. 나도 거기에 맞춰 내려가서 분유 타오고, 입가에 톡톡톡을 중얼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자는 딸에게 사정해서 밥을 먹인 후, 때로는 누렇고 때로는 초록의 응가를 치우고, 다시 속싸개로 싼 다음에,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발바닥을 때렸다. 나는 이 시대와 앞선 시대를 살아간 부모들이 존경스러워졌다. 게임을 하며 종종 나를 감독하던 아내는 엄마처럼 잘한다고 나를 칭찬했다.

“자기야 엄마 필요 없겠어. 완전 잘하는데?”

“내가 요새 프로페시아를 먹었더니 남성호르몬이 덜 나오나 봐. 좀 여성스러워진 것 같아.”

재하에게 머리 풍성한 아빠가 되고 싶어 탈모방지약을 먹었지만 덕분에 재하는 엄마가 두 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내도 약을 먹으니 여자 마음을 더 잘 이해한다며 격려해주었다.     


이 땐 좋았지...


그렇게 시지프스 마냥 내내 돌멩이를 밀어 올리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어머님을 제외한 처가댁 식구들이 아기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1인실의 장점이 있다면 방문객 면회 때 신생아를 보기 더 편리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원래대로라면 신생아실 앞에 줄 서서 기다렸다가 3분 정도 유리창 밖에서 봐야 하지만 모자동실을 한다면 아기를 안아볼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 물론 서약서를 쓴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좋지 못한 점도 있다. 마침내 친구 경수도 찾아왔기에 이모들에게 재하를 인계하고 난 잠시 놀러 나갔다. 경수가 재하 탄생 기념으로 전자체온계를 선물로 줬다.

“야 고마워. 나도 얼른 결혼 축의금이랑 출산 축하선물 줘야 하는데.”

“그거 못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더 고맙다.”

“... 밥이나 사. 비싼 거 먹어야겠다.”     


기분 좋게 부대찌개를 같이 먹고, 차를 마시고 병실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 재하가 딸꾹질을 멈추지 않더니 내리 운다는 거였다. 배고프기도 한 시간이었다. 마침 어느덧 열두 시간이 지나서 재하 반납 시간이기도 했다. 일단 처가댁 식구들을 배웅하고 우리는 잠깐 고뇌했다. 재하 분유를 받아와서 먹이고, 진정시키고, 트림시키고, 응가하면 치운 후에 돌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우는 딸을 신생아실로 던져 넣을까. 나는 더 좋은 아빠이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일단 상황을 회피하기로 했다. 그 시간에 저 루틴을 한 번 더 한다면 집에 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마음속으로 나름의 합리화를 했다. 규정상 보호자는 병실에서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생아실에 재하를 내려보내겠다고 전화를 했다.      


손수레에 덮개를 덮어 딸을 데리고 내려가는 도중에 재하는 줄곧 울었다. 그 통곡소리에 마음이 아렸다. 재하는 아무 생각 없이 배고파서 짜증 낸 거였겠지만 나는 ‘이대로 나를 보낼 거냐’라고 계속해서 들렸다. 신생아실에 도착해서 간호사님을 호출했다.

“우는 채로 데리고 와서 죄송해요. 어떻게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아 네. 원래 아기들은 우는 게 당연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일도 모자동실 하시나요?”

또 잠깐 고뇌했다. 사실 오늘 체력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피곤했어서 내일은 쉬고 싶기도 했다. 오늘 마무리가 재하의 웃는 모습이었다면 이런 번뇌도 없이 ‘아니요~ 내일은 안 합니다^^’ 라 했겠지만 재하의 울던 얼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결국 육아체험 1일 차의 아빠는 비겁해지기로 했다.

“내일은 쉴게요.”  


아내에게 내일 오겠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갔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내내 재하의 울던 얼굴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첫사랑이 떠나버린 마냥 가슴을 뭐가 찌른 듯 아팠다. 계속 재하의 냄새도 맴돌았다. 지하철에 도착해서도 집에 들어가서도 그 내음이 났다. 약간 꼬릿 꼬릿 한 노란 비린내의 향이었다. 그것이 고새 옷에 배었는지 마음에 베었는지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하는 그때부터 늘 내 코앞에 매달려 자기가 있음을 알렸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자 8시도 되기 전에 신생아실로 달려갔다. 입구에서 부터 딸을 찾으러 왔다고 소리쳤다. 간호사님은 웃으면서 재하를 내보내 주셨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나는 손수레를 끌면서 미안한 마음 반, 즐거운 마음 반을 담아 “아빠가 미안해. 오늘은 더 재밌게 아빠랑 놀자.”라고 딸에게 말을 걸었다. 딸은 그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병실에 올라가자마자 푸짐하게 똥을 쌌다. 나는 응가를 치우고, 입가를 톡톡톡 해서 밥을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재운 다음 다시 응가를 치웠다. 괜히 서명을 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열 시간이나 더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재하 똥냄새도 같이 코앞에 매달려 자기도 있음을 알렸다.      


오늘만 모자동실하고 내일은 신생아실로 돌려보낸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흘을 재하와 함께 보냈다. 퇴원 전날만 몸살이 나서 같이 있지 못했다. 재하가 없으면 홀가분하고 편할 줄 알았는데 막상 둘만 있으니 심심하고 할 게 없었다. 아내는 주로 게임을 해서 별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7박 8일의 입원 끄트머리에 가니 모유가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자동실이 속성으로 그새 우리 셋을 가족으로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퇴원하기 전날...오늘은 왜 안 데리고 가냐?

퇴원하는 날 신생아실로 재하를 받으러 갔다. 자연 분만하고 사흘 만에 퇴원하는 부부들은 아기를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조리원에서 나오신 도우미분이 대신 안아주는 모습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다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으쓱으쓱 딸을 안고 조리원으로 향했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그분들도 곧 아이를 잘 안게 되실 것이었다. 그 살짝 으쓱거림이 별 의미 없는 거들먹거림이었겠지만 며칠간 우리가 함께한 나름의 시간이 담겨있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내에게 물었다.

“다시 가면 모자동실 할 거야?”

“끝에 하루나 이틀만 하면 충분할 것 같아. 더 쉴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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