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아내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워낙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뱀파이어라고 불렸던 옥이었다.
허리가 아프다고도 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환부를 주물러 드렸다.
아내는 맘 카페에 이 증상들을 찾아보고는 임신 초기 증상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 추론을 중시하는 통계학도 출신의 나였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함께 불렀다.
"초기 증상~ 초기 증상~ 초기 증상이 나는 좋아" 하는 곡이었다.
늘 말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극단적인 위험기피 성향의 나로서는 합창에 동참하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금요일 새벽 다섯 시에 옥은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같이 깰 정도로 위풍당당하고 확신에 찬 기상이었다.
군대 전역날 아침의 내 모습 같았다.
아내는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쥐고 간 것은 저번 주에 로또 사는 마음으로 샀던 조기 측정 임신 테스트기였다.
이게 맞을 거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역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사 왔던 것이었다.
잠시 후에 아내가 돌아오자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임테기는 왜 한 거야?"
"꿈에 임신 테스트를 해봤더니 두 줄인 거야, 그래서 지희랑 병원 같이 가는 꿈 꿨어."
"아, 우리 원자가 혹시 태어나면 태몽이 임테기 두 줄이겠다."
주먹은 가깝다는 것을 순간 잊었었다.
짧고 강렬한 손찌검 후에 옥은 태몽은 따로 꿀 것이라고 말했다.
태몽도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을 그동안 내가 미처 몰랐다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 참 교육의 통증이 가시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시간이 3~4분 정도 지나자 옥은 결과를 확인해보기 위하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 남편- 이것 봐봐. 두 줄이야. 두 줄 맞지?"
착한 사람 눈에는 잘 보이겠다는 센스 있는 답변을 준비하고 나가서 봤지만 내 눈에도 보이긴 보였다.
흐릿하고 연하고 약간은 칙칙한 색이었지만 두 줄인 것은 맞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조금 더 진해졌다.
임신 테스트기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던 우리 둘은 반쯤 임신이 진행되었다는 뜻일까 하여 갸웃거리다가 일단 출근을 했다.
아내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월급 도둑질을 하며 지식인과 맘 카페를 내내 들락거린 모양이었다.
새로운 소식들이 실시간으로 메신저로 날아왔다.
"남편- 초기에는 원래 테스트기가 흐리대~"
"남편- 아프로테 브랜드는 원래 회색이래~"
"남편- 이따가 해피타임 꺼 사 오는 거 잊지 마~"
"남편- 이봐 이봐 글 올렸더니 사람들이 임신 맞는다고 댓글 달았어!!!!!!"
"남편- 나 벌써 눈물 날 것 같아~"
나는 공감하느라 땀이 난다고 하고 싶었지만 어제 생긴 멍 자국이 아직 남아 있어서 참았다.
캡처 화면은 카카오톡으로, 대화는 메신저로, 질문은 카카오톡으로, 대답은 다시 메신저로.
오락가락 헷갈렸지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나저나 나는 옥에게 맘 카페는 만 악의 근원이니 자주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옥에게 맘 카페는 바이블이자 꾸란이자 종교적 경전 그 이상이 되어 버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임테기를 4개 샀다.
두 개는 조기 검진이 가능한 것, 두 개는 보통의 테스트기였다.
조기 테스트기는 '아프로테'가 아닌 '해피타임'으로 샀기 때문에 무언가 과학적인 교차 검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옥의 모습은 이도동 임테기를 모두 사재기하겠다는 생각 같아 보였다.
사행성 뽑기도 아니고 1시간에 한 번씩 테스트를 하겠다는 기세였다.
말려야 했다.
앞으로 돈이 들어갈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퇴근 시간에 만난 옥은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당당히 가방을 '노 룩(No look)'으로 내게 내밀었다.
그전에는 미약하나마 미안함과 민망함이 있었다면은 이제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나를 부렸던 것 마냥 너무도 당당해서 나도 가방을 받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임신 추정 1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도 이런 당당함이라니.
앞으로가 다소 걱정되기는 했다.
이제 아내는 당당하게 배를 내밀었다.
손은 뒷짐을 지었다.
에헴도 할 줄 알았는데 그건 하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봤던 포즈인 것 같았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이제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던 재작년 12월에 했던 자세였다.
그때 우리는 당장에라도 원자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나이 때문인지 그러지는 않았다.
한 방에 똭 애가 생기는 건 혈기 넘치고 불장난 좋아하는 스무 살들의 이야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자 옥은 점차 겸손해졌었다.
배는 뒤로, 손은 앞으로.
하지만 그 희미한 두 줄을 보자마자, 옥의 배는 앞으로 손은 뒤로 도로 가게 된 것이었다.
옥은 그날 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며 얼른 자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갔다.
물론 자기 전에 허리 안마는 다시 해드렸다.
엎드리면 원자에게 영향이 가신다 하여 비스듬히 누워 있는 허리를 주물러 드렸다.
다음 날 아내의 아침은 4시에 시작되었다.
전투준비 태세처럼 총알같이 침대에서 튀어 나가는 아내 덕분에 나도 함께 깨게 되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는 환호성이 들렸다.
"남편!! 두 줄이야!! 두 줄!!!!!!"
아내가 너무 기뻐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옥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니 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4시에 일어났기에 조금만 더 얘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한 7시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자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맘 카페의 모든 글과 댓글을 읽은 모습이었다.
이제 옥은 임신 테스트기로 석사논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덕후는 덕후를 알아본다고, 우리는 이 덕후 냄새에 서로 끌렸던 모양이다.
이제 옥의 태교는 이틀 치부 터 시작되었다.
영어공부를 하겠다며 집에 있던 TOEIC VOCA를 꺼냈다.
평소에 영어공부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임산부와 태아에게 좋다고 토마토를 먹겠다고 했다.
설탕 반 토마토 반으로 먹었다.
임신 확인으로 조기 퇴근이 가능해지면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했다.
다시 영어가 낫겠다며 CNN을 틀었다.
그리고 아내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바로 잤다.
이제 옥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보통 무엇을 지시할 때 그간에는
'해라->언능 해라->혼난다->혼낸다'의 메커니즘이었는데
이제는 '해라->혼낸다'라는 두 단계가 생각된 지시 과정 간소화가 시행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귓등으로 듣지 않게 되었다.
옥에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임테기 두 줄을 관계 후에 30분 물구나무서기의 힘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배운 만큼 배운 사람이 그런 유사과학이나 미신을 믿으면 안 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마치 옥은 역경과 고난을 겪다가 회심의 물구나무서기라는 필살기로 역전에 성공한 주인공이었고, 나는 이론밖에 없고 입만 산 방해꾼 같았다.
이제 패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도를 순순히 따르라고 옥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예민옥'이니 알아서 잘 모시라고도 했다.
패배자는 말이 없이 그저 순종해야 했다.
나의 앞 날은 어찌 될 것일까.
어찌 되었건 우리는 이제 기다린다.
다음 주에 병원에 함께 가기로 했는데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엄마는 임테기의 두 줄을 보고 그 어떤 그림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언젠가 원자가 커서 그 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오겠지.
물론 옥의 저 말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까먹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