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놀이에서 월드 플레이로
여름 방학 summer break의 서막이 올랐다.
아침부터 아이들은 애니멀 왕국 The Animal Kingdom 놀이에 여념이 없다. 만 4살과 7살인 두 아이는 열한 마리의 괴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애니멀 왕국을 구하기 위해 용사를 자처했다. 쿠션과 블락으로 쌓아 올린 구조물에 담요를 늘어트린 (폭포란다) 작은 공간은 안전 가옥 The Safety House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그 위에 높이 올린 성은 '치유의 성 Healing Castle'이다. 몬스터의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주변을 마그나타일로 막아놓았다. 아이들은 여름 방학 첫날부터 오늘까지 거의 3일 내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며 영웅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의하면 영웅 이야기에는 17단계가 있다. 이 단계들은 다양한 분야 (문학, 심리학, 신학 등)에서 받아들여 각 단계들을 통합하거나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영웅 이야기는 크게 3가지 구조를 가진다. 바로 이별 Separation, 시작 Initiation, 그리고 귀환 Return이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정확하게 이 세 단계 구조를 따라서 놀이를 진행시킨다. 애니멀들이 평화롭게 살던 목가적인 나라에 갑자기 들이닥친 몬스터들. 첫째 아이가 먼저 방어선을 넘어 직접 몬스터들을 토벌하자고 제안하고 둘째 아이는 조금 망설이다 자기는 일단 수성을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곧 마법이 발현하여 동료(첫째)의 여정에 합류한다. 첫 번째 몬스터는 먹이로 유인해서 탑에 가두는 걸로 처치하고 두 번째 몬스터는 둥지로 직접 찾아가 처단했다. 중간에 간식도 먹고 휴식도 취하며 몇 시간을 (사실 3일 내내 했다) 놀이에 심취했다. 첫날에는 다섯 마리를 처리했고 둘째 날에 나머지 여섯 마리를 죽였다. 중간에 몰래 몬스터 서식지에 잠입해서 그 지역에서만 나는 식물로 애니멀 주민들의 치유 포션까지 만들어왔다. 그렇게 끝난 모험의 마무리는 축제였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기록은 두 페이지의 신문 발행으로 담았다.
따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동안 읽어온 아이들의 책에 영웅의 여정이 있었다. 오래된 그림 형제의 동화에도, <Where is Halmoni?> 같은 최근에 나온 픽쳐북에도 영웅 서사는 늘 존재한다.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자신이 듣고 읽은 이야기를 놀이에 녹여내고 있었다. 즉, 상상 놀이는 스토리텔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아주 오랜 방식처럼 구비 전수되는 이야기의 틀에서 아이들의 놀이가 싹트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는 것은 아이 개개인의 경험과 내면세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놀이의 스토리에 집중할 수도 있고 그 안에 있는 구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놀이가 그동안 들은 이야기들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상상 놀이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상당히 전문적 지식 또한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애니멀 왕국의 주민으로 받아들이는 동물의 기준은 포유류였다. 이유는 집에 있는 동물 인형 종류가 대부분 포유류밖에 없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래 인형을 가지고 온 둘째가 '고래도 주민으로 받아줘야 한다'라고 말하니까 첫째가 '고래는 포유류니까 당연히 된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둘째는 '그럼 상어도 포유류냐?'라고 질문했고 첫째 아이는 능숙하게 상어를 어류로 분류했다. 하지만 상어는 고래의 친구로서 '예외 조항'을 발현시켜서 주민으로 받아들여줬다. 이후에는 동물들의 안전을 위해 육식동물들의 가옥과 초식동물들의 가옥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육식성이냐 초식성이냐에 대한 조사도 이어지고 (백과사전을 사용한다) 마침내 동물 분류가 끝났을 때는 두 아이 모두 상당한 지식 공유를 마친 뒤였다. 나는 이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어쩌면 놀이는 단순히 유희만을 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깊이 조사할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지만, 확실한 건 이 과정을 통해 두 아이 모두 '미니어처 박물관 miniature museum을 만들고 싶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사정이야 어떻든 동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셸 루트번스타인의 책 <내 아이를 키우는 상상력의 힘 (Inventing Imaginary Worlds: From Childhood Play to Adult Creativity Across the Arts and Sciences)>에 의하면 월드 플레이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촉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나아가 아이들이 월드 플레이를 할 때 어른들은 자신의 흥미, 방법, 판단을 놀이 활동에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p.387). 나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라 이번에도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들도 딱히 나의 참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필요한 도움과 안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존재할 뿐이다. 이 책에 의하면 어린 아동의 상상 놀이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 장소를 제공하라. 이 장소는 어디든 될 수 있다. 또한 이 공간은 심리적으로도 편안하게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예: 애니멀 킹덤은 거실 전체와 소파 구역 -> 부엌과 마주 보고 있어서 보호자가 지켜보기가 가능하다)
- 시간을 제공하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신성한 놀이의 시간을 따로 떼어 두어라. 아이가 '심심해'라고 말하는 순간에 놀이 시간을 제공해도 좋다. 권태란 창조성을 일깨우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 389).
- 재료를 제공하라. 아이들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재료를 주어라. 각각의 재료를 품목별로 제공하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가 하려는 놀이의 필요에 의해 재료의 용도를 변경하라 (예: 애니멀 킹덤 안전 가옥에 드리운 파란 이불 -> 은신 폭포)
-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라. 주어진 공간, 시간, 재료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인정해 줘라.
- 허용하도록 하라. 아이의 놀이를 지원하고 그 놀이의 가치를 인정해 줘라. (예: 애니멀 킹덤은 그 후로도 이틀이나 더 이어진 긴 놀이였고 그 기간 동안 우리 집 거실은 블록 하나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둬야 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추가하고 싶은 사항은 아이의 놀이에 놀라지 마라 이다. 애니멀 킹덤은 몬스터를 열한 마리나 죽이는 어찌 보면 잔인한 영웅 스토리다. 그 과정에서 부상당한 동료들도 치료해야 하는 (상상이라도) 피 튀기는 전투의 현장인 것이다. 아이들이 몬스터의 목을 자르고 사지를 잘라 마법의 호수에 던져버려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말라는 도덕적 조언도 최대한 삼가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는 다른 의미로 '억압되어 있던 감정의 분출이자 카타르시스'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병원을 무서워하는 아이와 병원 놀이를 한다고 해보자. 아이는 다시 환자 역할을 하고 싶어 할까 의사나 간호사 역할을 하고 싶어 할까? 당연히 후자다. 자신의 아팠던 순간을 반대 입장에서 재연함으로써 그 당시의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와 통하는 부모는 노는 방법이 다르다>라는 책을 참고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이가 폭력적인 놀이를 한다 해도 실제로 그 아이가 폭력성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놀이라는 안전한 장치를 통해 자기 통제력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미셸 루트번스타인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파라코즘 paracosm 까지는 아니더라도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꽤나 능숙한 상상 놀이 전문가다. 이 놀이 이전에도 이미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상 놀이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놀이 방식과 취향을 찾아왔다. 나는 부모로서 그것을 깨달은 계기가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선택하고 그 놀이에 빠져서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느낄 때였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존 듀이는 아동이 잘 놀고 있다는 판단을 아래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해 보라고 한다 (p.398).
1. 제안된 놀이 방식이 아이에게 진정으로 자기 놀이처럼 느껴지는가? (Will the proposed mode of play appeal to the child as his or her own?)
2. 그것은 아이 안에 본능적인 뿌리를 지닌 것이며, 아이 안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능력들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것일까? (Is it something of which he has the instinctive roots in himself, and which will mature the capacities that are struggling for manifestation in him?)
3. 제안된 활동이 아이의 충동에 단순히 흥분만을 주고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더 높은 의식과 행동의 단계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Will the proposed activity give that sort of expression to these impulses that will carry the child on to a higher plane of concsiousness and action, instead of merely exciting her and then leaving her just where she was before?)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의 아이들은 잘 놀고 있는 것이다. 나도 위 질문들에 답을 내보며 이번 한 주의 kid rotting 기록은 마무리한다.
* 미셸 루트번스타인 (2016) <내 아이를 키우는 상상력의 힘> (번역 유향란) 문예출판사
** Root-Bernstein, Michele. 2014. Inventing Imaginary Worlds: From Childhood Play to Adult Creativity Across the Arts and Sciences.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