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방학 때 실컷 '썩기'로 했다

무계획이 계획인 키드 로팅 Kid Rotting 해보기

by 김은수

"엄마, 난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게 많아? 여름 방학인데도 너무 바빠."


작년 이맘때, 7살 아이의 한마디에 나는 멈칫했다. 매년 6월이면 시작*되는 ‘섬머 캠프 summer camp 스케줄 전쟁’ 속에서, 나는 늘 최고의 캠프와 유익한 활동으로 아이의 시간을 채워주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던 차였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이 그렇게 힘든지 물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푹 내쉬더니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뗀 아이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난 그냥 집에서 쉬고 싶어. 이미 학교에서 너무 많은 걸 해서 힘들단 말이야. 그런데 또 밖에 나가서 뭐든 해야 하는 게 힘들어."


미국은 여름 방학이 길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보내기가 쉽지 않다(방학이 짧아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미리 등록해 둔 섬머 캠프를 간다. 수영, 축구, 테니스 등 스포츠 관련 섬머 캠프는 물론, 음악, 미술 그리고 예복습을 위한 섬머 캠프도 있다. 심지어 지인 중 한 명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아직 자전거를 못 타서 자전거 캠프에 등록했다고 했다. 종류도 많고 난이도 조정 (대개 연령 별로 선택 가능)도 가능한 캠프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각 가정의 재정 상황에 맞게 맞춤으로 스케줄링이 가능하다. 아마 한국의 방학 체험 학습과 비슷한 게 미국의 섬머 캠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고로, 별생각 없이 남들처럼 아이들을 키우고자 했던 작년 여름의 '나'는 이제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첫째 아이를 위해 '맞춤식 섬머 캠프'를 계획해 두었었다. 학습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Math and Reading Comprehension advancement class (수학과 문해력 예습반)을 등록해 뒀었고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를 생각하며 수영 캠프, 창의성을 위한 아트 캠프에다가 유익한 정보를 얻게 하기 위해 과학 박물관 science museum 체험 등도 꼼꼼하게 등록해 뒀었다. 나는 좋아할 아이를 생각하며 달력에 가득 들어 있는 알찬 일정에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아이의 한 마디에 내 자부심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오히려 미안함이 밀려왔다. 내가 아이에게 미리 물어보기나 했던가? 아마 나는 여름 방학 내내 아이를 집에서 목적 없이 놀게 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에 쫓겼던 듯하다. 그리고 이건 나만이 아닌 전 세계 '서구권 교육'을 지향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통 norm'이라고 생각하는 흐름이다.




2024년 여름에 우리는 모든 섬머 캠프를 취소하고 집과 야외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일정 조절이 자유로운 내가 중심이 되어 최대한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었고, 일정한 시간을 바깥에서 보냈다. 놀이터는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고 가까운 바다나 트레킹 코스도 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캠프 신청 없이 아이들과 그저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당연히 집에서 아무 계획 없이 놀이하는 시간도 충분히 가졌다. 미국을 비롯한 서국권 국가에서는 우리 가정과 같은 '언스쿨링'을 보고 "Kid Rotting", 즉 '아이의 시간을 썩히기'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반문화 counter-culture가 오히려 앞으로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름 방학 동안의 언스쿨링과 키즈 로팅 unschooling & kid rotting 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우선 아이들이 정해지지 않은 비구조화된 시간 unstructured time 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자율성)과 생각의 확장(창의적 사고)이 가능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자기 물건을 정리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뜻밖의 수확이었는데, 아이들이 내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침대 정리를 하고 벗어 놓은 옷은 빨래통에 넣는 등 부모 입장에서 일이 줄어드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집안일인데 아이들이 수업이니 캠프니 하는 활동들로 바쁘다 보면 정작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은 못 배우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것을 깨닫게 된 건 올여름 방학 섬머 캠프 광고들 중에 '필수 생활 기술 essential life skill: 아이가 스스로 빨래를 빨래통에 넣는 법과 침대 정리하는 법을 전문가가 가르쳐 드립니다'라고 써둔 섬머 캠프를 보고 나서였다.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알려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제 밖에서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아웃 소싱 교육'의 한 가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또 하나 우리가 배운 건 계획 없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법이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놀이와 놀이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과의 단단한 애착 관계를 기반으로 한 놀이를 꾸준히 있어왔다. 그 결과 아이가 놀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이에게 스스로 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조금의 도움과 힌트를 줄 뿐이다 (이를 스캐폴딩 scaffolding이라고 한다). 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은 하루 종일 아이를 관찰하거나 놀이의 변화를 보기 힘들었지만 여름 방학 기간 동안 키드 로팅 kid rotting 하며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아이가 노는 패턴과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관심 세계를 확장시켜 궁극적으로 그것을 배움으로 이끄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로서도 키드 로팅은 배움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아이는 지루해지면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스스로 재미있는 걸 찾게 된다. 그것이 일종의 놀이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 호기심을 느끼다가 부모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하는 역할은 그 질문에 바른 답을 찾도록 (나는 바로 답을 주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이끄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상 앞에서 책 속으로 그리고 도서관으로 종횡무진 다녔다. 아이는 방학 동안 범고래에 빠져들었고 씨월드 Sea World에 가서 직접 범고래쇼를 보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아이 손을 잡고 도서관을 다니며 범고래의 생태에 대해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스스로 범고래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으며 이런 관심은 학기 중에 있었던 과학 박람회 science fair로까지 이어졌다. 등수를 매기는 방식에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이 박람회에서 순위를 매겼고 아이는 거기서 1학년 전체 1등을 했다. 스스로 찾은 관심을 확장시켜 탐구하고 체계화시키는 과정은 부모가 함께 해 줄 수는 있지만 강제로 시킬 수는 없다. 나는 아이의 배움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자랄 때는 생각해 보지 못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물론 이런 언스쿨링, 키드 로팅의 형태는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 가정에 100% 적용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부부 중 한 명이 가족 전체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외벌이 가정을 '현대판 럭셔리'라고 지칭하는 말이 무리가 아니다. 또한 가정 내의 어른 모두가 자기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장려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퇴근 후 시간이 있고 주말이 있다. 평일에는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가진 부모들이 주말에 아이를 체험 학습에 보낸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하지만 아이의 생각은 다르지 않을까? 아이도 부모처럼 주 5일 학교를 다니고 학원을 다닌다.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아이도 쉬고 싶을 거고 주말에는 부모와 무계획으로 빈둥거리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런 시간이 아이에게 쓸모없는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를 집에 있게 하면 부모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 중 하나가 스크린 타임일 것이다. 나는 제한을 둔 스크린 타임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아이들을 키워보면 이 제한을 둔다는 게 의외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딱 30분만 보자 하고 영상을 틀면 부모가 그 시간만큼 충분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보여달라 조르는 아이를 보며 오히려 죄책감만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대하기로 했다. 그저 단순하게 '아이가 어린 시절 영상물을 시청한 시간만큼 부모와 심리적으로 멀어진다'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아이가 영상을 과도하게 시청하지만 않는다면 퀄리티 타임을 통해 부모와의 관계를 견고히 다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개인적인 주문 같은 것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것을 일종의 '노후 대책' 즉 은퇴 준비라 생각하고 최대한 아이를 미디어 노출에서 떨어트려 두고 있다. 그렇게 해야 내 안에서 아이에게 티브이를 틀어주고 싶은 열망이 일어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동안도 이 원칙은 지키고 있으며, 우리 집 아이들 (초대받은 손님들도 포함)은 누구도 게임을 하거나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루해하면 '그래도 괜찮다'라고 한다. 굳이 아이에게 '심심하구나.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하며 놀이 제안을 하지도 않는다. 단지 우리 집에 어떤 장난감 혹은 보드 게임이 있는지 알려줄 뿐이다. 제한을 둔 범위 내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하면 그 누구도 불만이 없다. 집에 있는 것 중에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게 단 하나라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놀이를 써둔 룰렛을 만들어 돌리거나 (룰렛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놀이들을 쓴다), 한 가지에 흥미를 보이면 자연스레 관련 책이나 도구를 슬쩍 옆에 두는 등의 스캐폴딩을 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놀이에 빠지면 자연스레 부모도 쉴 시간이 확보된다. 옆에서 책을 읽는다거나 이렇게 노트에 글을 쓸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방식을 일 년 넘게 고수 중이며 여름 방학에도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싶어서 조른다거나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집은 올여름 방학도 그저 아무 계획 없이 놀 계획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아이 발달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치밀한 계획이다. 비록 Kid Rotting이 우리 아이 썩히기라고 불린다 해도 나는 그것이 우리 아이를 더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단순히 아이 자신 만의 성장이 아닌 우리 가족에게도 값진 시간이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소아과 전문의 케네스 긴스버그의 말처럼 가족과의 시간도 책을 읽는 시간도 자연 속에 있는 시간도 모두 성장이다. '썩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모두의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여름 방학을 그런 쉼이자 성장의 시간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이들과 빈둥거리며 시간을 썩히는 게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거주 중인 가족이다.

** 관련 기사 링크

"I stopped overscheduling my children's lives - they flourished"

"Is It OK for Your Kids to ‘Rot’ All Summer?"

"‘Kid rotting’: why parents are letting their children go wild this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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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